시인의 말
일인 성분분석표
정채원
지금껏 쓰고 버린 얼굴은 몇 개였나, 앞으로 써야 할 얼굴은 또 몇 개나 될까? 시 한 편 한 편에 하나씩의 얼굴이 녹아 있다. 새벽에 비탈을 헉헉대며 오르는 얼굴, 해가 중천에 떠도 한밤중인 얼굴, 파이프 누수로 곰팡이가 난 벽지를 바라보며 한숨짓는 얼굴, 하루하루 저승꽃처럼 번져가는 곰팡이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늘은 맘먹고 윗집 벨을 눌러야겠다. 누수의 원인을 잡아내라고, 어서 벽지를 새로 갈아달라고, 더 이상 못 참겠다고 단호히 따져야겠다. 윗집 파이프가 터졌는데 정작 윗집은 보송보송하고 어째서 아랫집이 흠뻑 젖는 걸까? 윗집 말대로, 오른쪽 집 파이프가 터진 건지 왼쪽 집 파이프가 터진 건지 아님 바로 우리집 파이프가 터진 건지 속을 다 열어보기 전에 확실히 말할 수 있나? 속을 다 열어보자고 들면 대체 몇 개의 속을 열어보아야 하나?
복잡한 신체 내부 신경망처럼 아래 위로 옆으로 연결된 아파트 생활, 몇 집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해도 바로 옆집을 부수는 듯하고 아랫집 아이가 피아노를 쳐도 윗집인가 싶다. 어느 집에서 고등어를 태우면 한 계단을 쓰는 집들에 스며드는 탄내, 비린내, 때로는 청국장 냄새.
숱한 냄새와 소리와 얼굴들이 울고 웃고 싸우고 드나드는 공동주택처럼 시집 한 권이 묶이곤 한다. 그 안에 출몰하는 얼굴들이 어쩌면 한사람의 얼굴이고, 다양한 소리들이 한 사람의 목소리이고, 때로는 향기롭고 때로는 퀴퀴하고 역겨운 냄새들이 한 사람의 냄새라는 듯.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 저 집은 어째서 빨리 문을 열지 않는 것일까? 아, 오래 애타게 기다리던 물건을 배달온 건 아닐까? 꼭 수취인에게 직접 전해주어야만 하는 그런 소중한 물건일지도 모르는데 주인은 오늘도 부재중인 것일까? 아, 어서 문을 열어……
‘벨이 고장이니 현관문을 두드려 주십시오.’ 바로 우리집에 써붙인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끊어지고 한참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시와세계』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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