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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3 / 오태환

Beyond 정채원 2017. 6. 1. 11:04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3

우주의 복도를 지나기 위한 사소한 질문②

 

  오

 

 

*

 

 

   1991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접경의 알프스 산중에서 발견되었다 5,300년 동안 빙하 속에서 썩지 못한 채 버텨 온 그는 갈색 눈의 인도유럽인종으로 밝혀졌다 그의 이름 외치Ötzi The Ice Man는 처음 모습을 드러낸 지역명에서 유래한다 그는 곰가죽 모자를 쓰고 풀잎망토를 걸쳤으며, 염소가죽을 묶은 정강이보호대를 했다 어깨에 박힌 돌화살촉과 피부 따위에 묻은 여러 사람의 혈흔으로 보아, 다른 부족과 교전하던 중 계곡으로 추락해 사망한 듯하다 구리도끼와 화살통, 주목朱木을 깎은 화살이 함께 발견되었다 그는 라임병을 심각하게 앓고 있었을 뿐 아니라, 편충 같은 기생충에도 감염된 상태였다 죽기 두 시간 전쯤 섭취한 것은 아이벡스의 육포와 소맥小麥이었다

 

*

 

   쇄골 근처에서 별빛들이 흘러내렸다 별빛들의 흐린 깊이에 느리게 감긴 채, 그는 양젖을 담은 가죽부대처럼 조심조심 숨을 기울여 털어내고 있었다 폭설과 얼음의 별빛들이 천칭자리와 안드로메다은하와 춘분점의 어둠을 비껴, 가파른 속도로 떠나갔다 어떤 별빛들은 횡격막과 충수돌기를 시침질하듯이 더듬었고, 어떤 별빛들은 회색늑대와 눈표범처럼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가 양젖을 담은 가죽부대처럼, 전 중량을 기울여 마지막으로 숨을 털어내며,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무엇일까 알프스의 빙하 속에서 자신의 전 중량을, 5,300년 내내 바로 저 캄캄한 별빛들로 염습을 하며, 5,300년 내내 바라본 것은 무엇일까

 

 

 

                       —《미네르바》2017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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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환 / 1960년 서울 출생. 1984년 〈조선일보〉〈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북한산』『수화手話』『별빛들을 쓰다』『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 시론집 『미당 시의 산경표』『경계의 시 읽기』.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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