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스크랩] 지나가나, 지나가지 않는 (외 2편)/ 신용목

Beyond 정채원 2017. 5. 22. 10:17

지나가나, 지나가지 않는 (외 2편) 2017년 현대시 작품상〉

 

     신용목

 

 

 

   이 시간이면 모든 그림자들이 뚜벅뚜벅 동쪽으로 걸어가 한꺼번에 떨어져 죽습니다. 아름다운 광경이죠. 그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 몸에서 끝없이 천사들이 달려나와 지상의 빛 아래서 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나의 시선과 나의 목소리와 거리의 쇼윈도에도 끝없이 나타나는 그들 말입니다.

   오랫동안 생각했죠. 깜빡일 때마다 눈에서 잘려나간 시선이 바람에 돌돌 말리며 풍경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거나, 검은 소떼를 끌고 돌아오는 내 그림자를 맞이하는 밤의 창가에서…… 목소리는 또 어떻구요. 투명한 나뭇잎처럼 바스라져 흩날리는 목소리에게도 내세가 있을까? 아, 메아리라면, 그들에게도 구원이 있겠지요.

 

   갑자기 쇼윈도에 불이 들어올 때,

 

   마네킹은 꼭 언젠가 살아 있었을 것만 같습니다. 아니, 끝없이 살해되고 있는지도 모르죠. 밤새 사랑했지만,

 

   아침이 오고 또 하루가 저뭅니다. 이 시간이면 서서히 어두워지다가 갑자기 환해지는 거리에서 태어났던 것들이 태어나고 죽었던 것들이 죽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꺼번에 깜깜해지는 거리처럼, 사랑하는 순간에 태어난 천사에게만 윤회가 허락될 리는 없으니까요.

 

 

 

유리창은 가장 멀리까지 간다

 

 

 

그 방 유리창에는 돌멩이가 날아온 흔적이 있다.

빛 속의 거미줄처럼,

 

거절된 고독이 있다.

 

겨울은 배를 뒤집은 채 하얗게 떠오른다. 그것을 건져낼 그물이 필요했다.

겨울이 가도

 

금은 남지만,

이제 침묵의 배를 따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모든 물고기는 결국 익사하고

 

고독은 해부되지 않는다.

다만

 

깨진 유리창을 닦다가 손을 베였을 때,

 

뒤편으로 멀어지다 그대로 밤이 되는 눈동자 핏빛 가지로 뻗어 있는 지진처럼

 

어떤 몸은 천천히 깨지기도 한다.

 

얼음은 깨지면서 녹는다.

 

 

 

모래시계

 

 

 

잤던 잠을 또 잤다.

 

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

 

누구의 이름이든

부르면,

그가 나타날 것 같은 모래밭이었다. 잠은 어떻게 그 많은 모래를 다 옮겨왔을까?

 

멀리서부터 모래를 털며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모래로 부서지는 이름을 보았다.

가까워지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잤던 잠을 또 잤다.

 

꿨던 꿈을 또 꾸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파도는 언제부터 내 몸의 모래를 다 가져갔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작품상 수상작 10편 | 공동체*, 차갑고 어두운*, 취이몽醉以夢, 지나가나 지나가지 않는, 유리창은 가장 멀리까지 간다, 도둑 비행, 나비, 대합실, 모래시계, 흰 밤 (*표의 두 편은 이전에 우리 카페에 소개됐음.)

 

 

                       —《현대시》201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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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아무 날의 도시』.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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