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에서 개시로
가령 하이데거에게 시는 존재자에 관한 진리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존재의 진리를 개시하는 매체다. 예술가가 세계를 처음으로 열어주면, 학자들은 열린 세계에 들어와 개념적으로 정돈을 할 뿐이다. 하이데거에게 시와 사유는 존재자의 재현이 아니라 존재 사건의 일어남에 관계한다. 시와 철학은 한갖 존재자의 세계를 다루는 과학적 사유를 넘어서 존재 체험을 매개한다. 그에게서 시와 철학은 똑같이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하이데거의 사상은 휠덜린이나 트라클과 같은 시인들의 창작과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7세기 합리주의 시대에는 시가 철학에 종속되어 있었다면, 이 고전주의 시학이 무너진 오늘날에는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오늘날의 철학자들은 문학에 영감을 주는 게 아니라 거꾸로 문학에서 영감을 받고 있다. 가령 하이데거에게 휠덜린이 갖는 의미, 벤야민에게 보들레르가 갖는 의미, 푸코와 들뢰즈에게 아르토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라. 이처럼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상의 대표자들은 모두 시를 비롯한 예술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오늘날 서계를 열어주는 것은 시이고, 학자들은 시가 열어준 세계 안에서 정돈만 하고 있는 듯하다.
요즘 철학자들의 글쓰기는 논문이 아니라 시를 지향한다. 그 결과 시와 철학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고, 철학적 텍스트는 저점 더 시적 에세이를 닮아가고 있다. 얼마전 우리 나라를 방문한 리차드 로티는 "구원적 진리에서 문학적 문화로"라는 표현으로 이 현상을 규정한 바 있다. 이성의 독재가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적 사유가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이성이 내버린 왕좌를 차지하려면 시는 철학만큼 어려워져야 한다.
진중권 <시와 철학>,『시인세계』 2003년 겨울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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