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물 위를 걸어온 자, 바실리스크 도마뱀 이야기/최금진

Beyond 정채원 2018. 9. 8. 02:37

  물 위를 걸어온 자, 바실리스크 도마뱀 이야기


  최금진


  진지함이라곤 없는 코미디처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돌아보면 내가 남긴 발자국들 지워지고

  한 발 빠지기 전 서둘러 다음 발 내밀어 길을 재촉하던 날들


  등에 뿔 나고, 머리에 혹 나고, 몸에 살기 돋은 한 사내의 이야

기는

  기실 겁이 많아 빠르게 세상을 도망쳐간 데서 시작된 것

  도전이 아니라 도주였으며,

  위대한 첫발이라고 믿었던 결심은 늘 위태한 마지막 발이었다


  발바닥이 경배했던 바닥이여, 어둠의 부력이여

  서너 발 앞에 당신이 당도해 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기적을 원하던 우스꽝스러운 동작

  두려움이 나의 결말이었구나

  지나온 족적들이 물 위에 떠내려간다

  허방을 보수공사 하는 눈송이와 새들처럼

  무너져 내리는 길들을 쌓아 올리며


  나 또한 도망치듯 당신을 떠나 왔다, 달도 뜨지 않은 밤에

  무너지는 발을 미처 빼지도 못한 채 다음 허공을 디디며

  당신을 떠나온 나의 이야기는 배신처럼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시인동네』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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