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걸어온 자, 바실리스크 도마뱀 이야기
최금진
진지함이라곤 없는 코미디처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돌아보면 내가 남긴 발자국들 지워지고
한 발 빠지기 전 서둘러 다음 발 내밀어 길을 재촉하던 날들
등에 뿔 나고, 머리에 혹 나고, 몸에 살기 돋은 한 사내의 이야
기는
기실 겁이 많아 빠르게 세상을 도망쳐간 데서 시작된 것
도전이 아니라 도주였으며,
위대한 첫발이라고 믿었던 결심은 늘 위태한 마지막 발이었다
발바닥이 경배했던 바닥이여, 어둠의 부력이여
서너 발 앞에 당신이 당도해 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기적을 원하던 우스꽝스러운 동작
두려움이 나의 결말이었구나
지나온 족적들이 물 위에 떠내려간다
허방을 보수공사 하는 눈송이와 새들처럼
무너져 내리는 길들을 쌓아 올리며
나 또한 도망치듯 당신을 떠나 왔다, 달도 뜨지 않은 밤에
무너지는 발을 미처 빼지도 못한 채 다음 허공을 디디며
당신을 떠나온 나의 이야기는 배신처럼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시인동네』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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