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연기
김상미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미하일 바흐찐은 자신의 책으로 담배를 말
아 피웠다.
그 담배 연기를 오늘날 내가 마시고 있다.
헤어지자 말하는 남자의 등 뒤로 담배는 만병의 시작이다 쓰인 커다란
플래카드가 펄럭이는 평원이 보인다. 헤어지기엔 평원이 너무 넓다. 큰 키
의 나무라도 몇 그루 있었으면… 그러나 자신이 쓴 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
울 수 있는 남자라면 이별의 독초에도 금방 익숙해지겠지.
그 담배 연기를 받아 마시며 천천히 평원의 입구로 들어선다.
푸드덕 몇 마리 비둘기들이 적막을 깨며 담배 연기처럼 흩어진다. 가지
마, 남자의 심중이 마지막 총알처럼 날아와 뒤통수에 박힌다.
그러나 이별은 섬광이 아니다. 섬광이 빠져나간 껍질이다. 그 껍질 때문
에 우리는 세계는 어디나 다 똑같음을 배우게 된다. 참으로 끊기 힘든 담
배, 그를 위해 자신이 쓴 책을 기꺼이 찢은 남자, 그 위에 찍히는 립스틱
자국.
아무래도 이곳은 이별의 장소가 못 된다. 이별은 철근을 깔고 시멘트를
바른 곳에서 이뤄져야 한다. 평원은 너무 넓고, 내리쬐는 햇살은 눈부시게
따뜻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평원을 가로지르는 내게 더 이상 눈물 따윈 흘리기
싫다며 평원의 푸른 눈들이 일제히 소리친다. 참으로 이별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다. 자신이 쓴 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우며 그 남자는 얼마
나 아팠을까?
그러나 이곳만 통과하면 나는 그와 헤어진다. 꿈같은 현실에 꿈같은 이
별이 살해당하는 장소에서 벗어나 또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내면으로, 내면으로 내려앉는 그늘진 공기처럼 무소부재의 함정 속으
로, 폐허 속으로,
박인환문학상 제4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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