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스로 타인
윤성택
길이 저녁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다가
초췌한 표정으로 어느 골목에서
계단을 접고 있을 때,
누군가 전봇대에 기대
불 붙이고 길게 흰 김을 뿜는다
안개가 피는 담배는 쓸쓸하지만
그 한 점 불빛은
먼 건너편 눈시울이 되기도 한다
서로를 알아본다는 건
상처보다 더 화끈거리는
내일이거나 어제를
손끝에 대어보는 사이,
당분간 달은 환약이고
새벽은 약포지처럼 번들거려
보름을 복용해야 한다
뜯긴다는 건 내 것을 내어 보이는 일,
상처는 안으로 저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터오는 불빛이다
길이 조용히 빨갛게 해를 빤다
툭, 먹구름을 떨군다
가로등 뒤가 손톱 끝처럼 까맣다
때 낀 날은 하루 종일 밖이었는데
손톱을 세워 벅벅 머리를 감는다
후련하다고 해야 할까 미련하다고 해야 할까,
사람은 후일담에서 비로소 추억으로 뽑혀 나오는 거라고
타인으로 헝클어진 음악이
가지런히 빗소리를 벗어놓는다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고 나면
비내음도 창문 틈을 비집고 귀를 댈 것이다
면봉 같은 불빛이 훑어보는 방안,
나는 가려운 것인지 자꾸만 자정을 후빈다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하고
젖은 수건처럼 눅눅해보기도 했을 나를,
거울이 흘깃 구석에 담아 놓는다
사람 사는 게 한 통속에 담긴 빨랫감만 같아
쌓인 무게로 쭈그러진 셔츠의 한쪽 팔이
간신히 통 밖에 걸쳐 있다
안경을 벗기고 엄지와 약지가 이마를 받치면
잠시 눈을 감아줘야 한다 옛일이 생생해
그 한 장면에 압정을 끼울 수 있다 다시 시간이
한꺼번에 인화되는 건 지금밖에는 없다는 걸,
소심한 추억은 잘 알고 있다 극적으로
같은 시각 새벽에 눈을 번쩍 떴다가
스르르 꿈을 놓아줄 수 있어서
가까스로 우리는 타인이다
⸺시 전문 계간 《딩아 돌하》 201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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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리트머스』『감(感)에 관한 사담들』, 산문집『그 사람 건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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