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박수현
가령, 한여름 짱짱한 오후 1시를
단물 빠진 껌처럼 벽에다 붙인다면
담장 너머 칼이나 가시개 가이소
막힌 아궁이나 구들짱, 굴뚝도 뚫십니더 외치던
칼갈이 아저씨 쉰 목소리 들을 수 있을까요
우물가 평상, 홍두께로 애호박 칼국수 반죽을 밀다가
한걸음에 달려가는 엄마의 광목 앞치마를 잡을 수 있을까요
가령,토끼잠 자다 깬 오후 3시를
오색 구슬알처럼 주머니에 넣고 굴린다면
이태 만에 돌아온 옆집 아편쟁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열 손가락 접었다 펼치며 그림자놀이 하는 것을,
땟국진 손으로 봉지쌀을, 또 한 손엔 새끼줄 꿴 19공탄을 거머쥔
아홉 살 난 그의 아들에게 희죽희죽 웃던 모습 훔쳐 볼 수 있을까요
가령, 계단참에 펑퍼짐한 엉덩이를 깔고 앉은 오후 5시를
대청마루 벽시계 태엽에 감아본다면
작약꽃 흐드러진 재실 모퉁이, 동생이 또 딸이래요라며
훌쩍이던 상고머리 계집애를,
장죽 백동부리로 땅땅, 놋재떨이 치던 할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요
가령, 깨진 부뚜막 타일 같은 오후 7시를
석유곤로에 올려 뭉근하게 끓인다면
새알심 뜬 팥죽 한 사발 맛볼 수 있을까요
그런, 어스름 양철 지붕에 내려앉은 분꽃 씨앗 같은 어둠이
사방으로 휘파람이라도 불어댄다면
덧댄 함석 홈통으로 빗물 내리는 소리 듣거나
금성 라디오에서 흐르는 배호의 노래 아직 흥얼댈 수 있겠지요
누가 앉았다 갔는지
혼자 흔들리는 그네를 보네
창밖, 놀이터 그네는 점.점. 발을 굴리고
깊어진 허공 속으로 어린 시간들은 빨려 들어가고
인화되지 못한 흑백사진들 위로
접질린 비꽃들 오소소 튀어오르네
『문학청춘』(2018,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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