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명암/김이듬

Beyond 정채원 2018. 12. 20. 00:26


명암


김이듬



이렇게 살면 폐인이 될 것 같아

짐을 챙겨 옆방으로 갔네


이렇게 살면 귀신이 될 것 같아

다시 짐을 챙겨 옆방으로 갔지


이렇게 살면 정말 귀신도 못 될 것 같아

짐 챙길 새도 없이 옆방으로 갔어


평생 이 방들을 차례차례


이런 방식으로는 안 돼

신비로운 복사기를 보며

영원히 중얼거릴 수 있다면 좋겠니


나는 옆방으로 가네

무릎 꿇고 바닥을 닦다가

다음 방으로 다음 방으로


빼라기 전에 빼는 게 사랑의 역사라면


고독하게 수행되는 끝없는 이동

칸토르비치는 이 작업을 무한이라고 했나


밤이면 불을 켜고 가스 불에 국을 데워

돈 내지 않으면 모든 게 끊어지네

끝은 끝 방

고요와 평화


불이 꺼지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 돌아와야지

나는 젖겠네



시집 『명랑하라 팜 파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