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검은 개의 시간/신용목

Beyond 정채원 2019. 3. 11. 13:00



    검은 개의 시간


    신용목



    가로등이 어둠을 허수아비처럼 흔드는 밤이다 아니


    가로등은 팽팽하게 목줄을 끌고 달려나와 어둠을 향해 짖고 있는 개


    봉지가 쓸려간다

    어딘가


    새들이 이삭으로 박혀 있는 데까지가 밤이라면 가로등이 붉은 속을

토하며 컹컹 짖는 데까지가 밤


    개


    내가 끌고 다녔던 마음 아니

    묶어놓았던


    밤이면 보이지 않는 몸에서 사슬 소리를 당기며 솟구쳐올라 사라지는

것들을 향해


    그리고 떨어져


    낑낑거리며 불빛의 반경을 도는


    개


    어둠 속에는 모든 불빛을 소리로 듣는 사람이 있어서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에는 마치 제 이름이 불려진 것처럼 환하게 밝아지는 얼굴이 있다

    아니면 총소리

    가슴에 맞아 붉은 것을 모조리 쏟아내듯이 낙엽이 쓸려가는 시간이 있다

    아니면 빗소리


    저녁에는

    모든 소리를 색깔로 보는 사람이 있어서 결국 까만색이 되고 마는 밤


    비


    가로등은 우산처럼 서서

    바람이 구부러지지 않게 쾅쾅 빛으로 내리치는 기둥


    가로등은 그대로 멈춰버린 거대한 빗방울 바닥에 부딪혀 흩어지기 직

전의 시간을 매달고 있는 단 하나의 순간


    그러면 보인다

    개라는 빗방울


    밤은 모두를 물어뜯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나라는 봉지를


    어느날 젊음이 나를 그곳까지 걷게 했다고 믿는다 너는 없고 네 방에

누웠다가 깜빡 잠들었던 가을


    흠뻑 젖은 꿈으로 깨어나 잠들었던 가을


    흠뻑 젖은 꿈으로 깨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도 아무도 없던 빈 방

    스위치를 올리면 어둠으로부터 전신으로 떨어져 내리는 검은 날개처럼


    소주를 사왔던 봉지가 찢긴 채 구석에 버려져 있었다



   『현대시』 201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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