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항(상)성/김정진

Beyond 정채원 2019. 3. 25. 15:37


항(상)성



김정진



여기서 잠시 불을 붙였다 갑시다


여름을 빨리 불러오고 싶었어요 하지(夏至)의 높은 태양을

만원버스 안에서 같은 리듬으로 동시에

흔들리면서 서로를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손이 녹을 수 있도록

몸이 따뜻해지도록

태울 것들을 좀 찾아봅시다


종점은 처음인가 봐요 당신에게서 반환점의 냄새가 나는데

한번 뒤돌아서 봐요 저 사람이 말하길

당신이 어제 앞에 앉았던 사람과 닮았다는데


잘 타는 것들 연기가

적게 나고 불빛이 멀리까지 가는 것들

내 전임자는 이런 여유를 허락한 적이 없었죠 원심력처럼 창밖을 보세요

동지(冬至)의 가까운 저녁을

저기 물미역처럼 하늘거리는 플라타너스들


전에는 이렇게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는 잘 지냅니다 덕분에


잘 지내지 못해요


모닥불은 처음인가 봐요 어두웠다 밝아지는 건

주변의 습도가 높아서 그렇습니다 가스가 많으면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다시 점점 멀어진다면

기념품 가게에서 그냥 나오는 사람처럼

여러 번 집었다 놓은 믿음은 어디쯤일까요


영생하는 사람은 늙지 않을까요 언제부터

소년이나 노인의 모습으로

망원경을 들어 기점을 찾아보세요


점차로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게 보일 겁니다



『시산맥』201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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