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성
김정진
여기서 잠시 불을 붙였다 갑시다
여름을 빨리 불러오고 싶었어요 하지(夏至)의 높은 태양을
만원버스 안에서 같은 리듬으로 동시에
흔들리면서 서로를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손이 녹을 수 있도록
몸이 따뜻해지도록
태울 것들을 좀 찾아봅시다
종점은 처음인가 봐요 당신에게서 반환점의 냄새가 나는데
한번 뒤돌아서 봐요 저 사람이 말하길
당신이 어제 앞에 앉았던 사람과 닮았다는데
잘 타는 것들 연기가
적게 나고 불빛이 멀리까지 가는 것들
내 전임자는 이런 여유를 허락한 적이 없었죠 원심력처럼 창밖을 보세요
동지(冬至)의 가까운 저녁을
저기 물미역처럼 하늘거리는 플라타너스들
전에는 이렇게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는 잘 지냅니다 덕분에
잘 지내지 못해요
모닥불은 처음인가 봐요 어두웠다 밝아지는 건
주변의 습도가 높아서 그렇습니다 가스가 많으면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다시 점점 멀어진다면
기념품 가게에서 그냥 나오는 사람처럼
여러 번 집었다 놓은 믿음은 어디쯤일까요
영생하는 사람은 늙지 않을까요 언제부터
소년이나 노인의 모습으로
망원경을 들어 기점을 찾아보세요
점차로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게 보일 겁니다
『시산맥』201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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