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자각夢, 정채원

미스 캐스팅 외 1편/정채원

Beyond 정채원 2019. 12. 15. 21:46

미스 캐스팅


정채원



극장이 떠나가라 웃다가 갑자기 얼굴이

와장창 깨어지며 눈물이 솟던

너는, 잘못 날아온 돌멩이였어


무대 뒤에서 지켜보던 감독은

손거울을 내던졌지, 조각난 얼굴들이

난생 처음 보는 표정으로

세상 끝까지 따라다닐 듯 이를 악물고


이봐, 얼른 모자를 써

장갑을 껴, 틈새를 막아야지

상처는 그렇게 아무 데서나

뜯어놓는 게 아니야, 불개미가 쏟아지잖아

지네가 기어가잖아


어느 틈에 객석 여기저기 기어 나오는

겹눈과 다족의 기억들

그 늪에 빠졌던 너는 내가 밀어 넣은 게 아니었어

울부짖으며 내밀던 내 손을 뿌리친 건 바로 너였던 거니?

빗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그녀를 받고 달아난 건 그였던 거야

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그대로 두고 엑셀을 밟았지


못 봤어, 취해 있었어, 눈알이 붉게 터지고

터지는 비명에 제 입을 틀어막는 예약석

박차고 일어나야지, 이 지정된 어둠을 부수고 빠져나가야지

그래도 극을 끝까지 보고 싶어, 아니

무대로 뛰어올라 저 배우 대신 주연을 해야겠어

나를 가장 잘 연기할 수 있는 건 바로 나야

아니야, 네가 먼저 내게 돌멩이를 던졌잖니

다시는 펴질 수 없게 우그러뜨렸잖니

어서 막을 내려다오, 불개미야

오 한번만 다시 시작하자, 내 사랑 지네야




정면성의 원리


정채원



앞을 보면서

뒤까지 보기 위해

목은 꽈배기가 되어가고 있다

끊어지기 직전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이

뼈를 때리는 건 왜일까


펄럭이는 가슴이 앞을 볼 때

얼굴은 늘 옆을 보는 건

옆모습이 더 자신 있기에?


쉬지 않고 떠나가는 시간을

호시탐탐 달아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자신이 없어


옆으로 돌린 얼굴에

눈동자는 아직도 물고기처럼 정면을 보고 있다

검은 눈동자가 하얗게 바랠 때까지

목이 끊어질 때까지


갈가리 찢긴 형상으로만

형상 너머로 갈 수 있다고

없는 불멸의 모자를 힘껏 눌러 쓰고




『문학의 오늘』2019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