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너머 우체국
유리잔이 금 가는 소릴 낼 때, 유리의 일이
나는 아팠으므로
이마에서 콧날을 지나 사선으로 금이 그어지며 우주에 얼굴이 생겼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고 있던 일
그의 무심이 정면으로 날아든 돌멩이 같던 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뜨
거운 물이 부어지며 길게 금 가는 유리잔이던 날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질문: 영혼은 찢어지는 물성인가 금 가고 깨어지
는 물성인가 하는 물음 사이
명자나무가 불타오르고
유리의 일과 나 사이 사월은 한 움큼, 으깨진 명자꽃잎을 손에 쥐여주었
다
나에게 붉은 손바닥 생길 때 우주에는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12월로 이동한 구름들이 연일 함박눈을 쏟아냈다 유리병 가득 눈송이를
담은 나는 자욱한 눈발을 헤치고 백 년 너머, 눈에 묻힌 우체국 낡은 문을
밀었다 창구에는 표정 없는 설인들이 앉았는데
나에게는 달리 찾는 주소가 없고 우주는 하얗게 휘발 중이다
시집, 『사과 얼마예요』 (2019, 6,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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