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을 위하여
레몽 크노
낱말을 한두 개 집어 들고
계란처럼 삶으세요
한줄기 자그마한 상식과
순진이라는 큰 덩어리를 합해서
약한 불에 데우시오
기교라는 작은 불 위에 말이오
수수께끼 같은 소스를 치고
별 몇 개를 그 위에 뿌리시오
후추를 친 다음 달아나는 거요
도대체 뭘 말하자는 겁니까?
글을 쓰려는 겁니다
정말이오? 글을 쓰자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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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아의 시학 5, 레몽 크노
엄숙한 시,
경건한 시에서 벗어나다/이규식
인용한 작품 「시학을 위하여」에서는 얼핏 보면 시에 대한 경멸과 야유, 조롱이 읽힌다. 레몽 크노는 평생 시를 썼으면서도, 15권이나 되는 시집을 펴냈지만 이런 스타일의 생각과 글을 멈추지 않았다. "시라는 게 뭐 대단한가, 시를 쓰려면 단어를 좋아하는 것으로 족하다. 나아가 오늘 저녁 내가 후대를 위해서 시를 쓴다는 가당찮은 생각을 한다면 그야말로 개똥이다." 라는 극언을 하기도 했는데 블랙 유머, 자조적 감성 그리고 부정적 의식 속에서 시에 대한 크노의 집착과 고민이 읽힌다. 말하자면 겉으로 드러나는 해학과 유머, 장난기와 조롱 속에 세상과 인간의 허무를 꿰뚫어 보는 철학자의 고민이 거기 자리잡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관념과 서재에 틀어박힌 묵은 언어를 제거하고 소생시켜 살아있는 생생한 말을 시에 담으려 한 것이다. 거리에서 흔히 듣고 통용되는 생명력 있는 언어를 시에 담으려는 시도는 자크 프레베르와 함께 20세기 프랑스 시가 성취한 괄목할 만한 수확으로 꼽힌다. (발췌)
《시와함께》 2020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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