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이윤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기로 했다 오버
널 떠나기로 했다 오버
엔진이 툴툴거리는 비행기라도
불시착하는 곳이 너만 아니면 된다 오버
열대 야자수잎이 스치고 바나나 투성일 거다 오버
행복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오버
죽이 끓고 변죽이 울고 이랬다 저랬다 좀 닥치고 싶다 오버
원숭이 손을 잡고 머리 위 날아가는 새를 벗 삼아
이구아나처럼 엉금엉금이라도 갈 거다 오버
왜 그렇게 쥐었다 폈다 꼬깃꼬깃해지도록 사랑했을까 오버
사랑해서 주름이 돼버린 얼굴을 버리지 못했을까 오버
엔꼬다 오버
삶은 새로운 내용을 원하였으나
형식 밖에는 선회할 수 없었으니
떨어지는 나의 자세가 뱅글뱅글 홀씨 같았으면 좋겠다 오버
그때 네가 태양 같은 어금니가 반짝 눈부시도록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오버
지구는 속눈썹으로부터 흔들리는 풍경으로부터
추억을 모아주고 있지만
태어나 참 피곤했다
벌어진 입을 다물려 다오 오버
내 손에 쥔 이 편지를 부치지 마라 오버
희망이 없어서 개운한 얼굴일 거다 오버
코도 안 골 거다 오버
눅눅해지는 늑골도 안녕이다 오버
미안해 말아라 오버
오버다 오버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이윤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
나는 앞발로 툭툭 쳐보며 굴려보며
베란다 철창에 쪼그리고 앉아 햇빛을 쪼이는데
지옥은 참 작기도 하구나
꺼내놓고 보니, 내가 삼킨 새들이 지은
전생이구나
나는 배가 쑥 꺼진 채로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점점 투명하여 밝게 비추는 이 봄
저 세상이 가깝게 보이는구나
평생을 소리없이 지옥의 내장 하나를 만들고
그것을 꺼내보는 일
앞발로 굴려보며 공놀이처럼
무료하게 맑은 나이를 꺼내어보는 것
피 묻은 그것
내가 살던 집에서 나와보는 것
너무 밝구나 너무 밝구나 내가 지워지는구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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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설 (1969 - 2020. 10.10) 경기도 이천 출생. 명지대 철학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수료.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2005년 국립극장 신작희곡페스티벌 당선. 2005년 거창국제연극제 희곡 공모 대상.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불가리아 여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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