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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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의 「처녑」 감상/정채원

처녑 박수현 여름나기로 단골 정육점에서 처녑을 샀다소의 세 번째 위장인 처녑은천 장의 잎새라는 뜻이랬다검정 비닐봉지에 싸인 채 서너 근으로갈무리된 전 생애의 중량밀가루를 묻혀 아코디언 같은 주름을 치댄다위장 하나 다스리는 일이첩첩산중 만경창파를 이고 넘는 것 같다는데어쩌자고 이 초식성 짐승은깊고 어둔 위장을 네 개나 붙잡고 있는 걸까쇠뜨기, 둑새풀의 독하고 푸른 숨결과매미의 울창한 울음과마지기 마지기 쏟는 작달비를 오래 되새김질했겠다 질기고 무더웠던 여름날을 견뎌내느라크고 순한 짐승의 위장 같은울음의 겹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처녑 한 젓가락을 기름장에 찍는적막한 허기의 저녁,씹을수록 싱싱해지는 천 장의 이파리가가망 없이 몸을 뒤집는다 시집『처녑』, 황금알 시인선 322-------------..

비평·에세이 2025.10.18

처녑/박수현 시집

새장 박수현검은 예장禮裝을 한 수도승 같았다두 기의 무덤* 사이 검은 풍금 한 대누가 이 후미진 곳까지 옮겨 놓았을까여기저기 무너지고 뜯긴건반들이 어찌 보면폐가의 처마 같기도 했다저녁 무렵이면 느릿느릿풍금 페달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두 옥타브 반짜리 바람상자에서 새는차라리 오래된 우물 속 같은새소리의 높고 낮은 음계들아무도 찾지 않는연세대 언더우드관 근처어느 손이 두 젊은 무덤을 달래러세상에서 가장쓸쓸하고 아름다운새장 하나 달아주고 싶었나보다 * 연세대 언드우드관 옆 언덕에는 연희전문 출신인 젊은 독립운동가의 무덤 두 기가 있다. 처녑 여름나기로 단골 정육점에서 처녑을 샀다소의 세 번째 위장인 처녑은천 장의 잎새라는 뜻이랬다검정 비닐봉지에 싸인 채 서너 근으로갈무리된 전 생애의 중량밀가루를 묻혀 ..

책소식 2025.10.18

난간 외/조원규 시인

난간 조원규 난간이란 것에는 아득한 두근거림이 배어있다 밤과 낮 쉼없이 바깥이 흘러오고 부딪고 또 밖을 속삭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의 난간들을 만져보려고 나는 무슨 말도 못 하면서 적막해져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온 세상과 사람이 난간인 것을 안다 난간 너머엔 부는 바람결 속에 난간 너머로 손을 뻗는 사람이 있다 강가에 내려간 적이 있다 물 냄새를 맡고 싶어 좁은 계단으로 강가에 내려간 적이 있다 휘어진 모래톱 부드러운 변방에 서서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았지만 물가에선 또 다른 냄새가 그리워 어디로 더 가야 하지 다리도 계단도 없을 곳이라면,아득히 귀를 열고 선 내게 흘러드는 물은 멀어지는 물살은 날더러 기슭이라고 그토록 어디든 닿고 싶어서 말 새벽 다섯시 나무의자에 앉아 둥근 빵을 먹는다 소리없는 칼을 넣어..

물텀벙 식당/정혜영

물텀벙 식당 정혜영 수평선은 선 하나를 긋기 위해서 얼마나 속을 끓였던 것일까 맑고 시원하다, 물고기 곰치국 멀리 가라, 쓸모없음 버림받음 물 속 암초와 해초 일렁이는 파랑의 눈 먼 두 손 따라가는 무와 콩나물, 한 움큼 파와 소금 맑고 시원하다, 곰치국 한 그릇 지난 밤새 무리했던 것일까 쓸모 있으려고 6월은 모른다 바람 폭풍으로 돌아서는 잔잔한 달빛 사리를 가슴 높이 돌담 깨진 바위 구멍을 점점 갈매기 모여드는 수평선 너머를 귀 기울이면 텀벙, 어부들이 곰치나 아귀를 바다에 던지는 소리 어부들이 잡은 파도를 바다에 돌려주는 텀벙, 못생긴 물고기 눈빛 놓아주는 소리 멀리 가라, 쓸모없음 버림받음 물 텀 벙, 흔들리는 선 하나 식당을 차린 것 같다 버린 ..

박상순의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평설 / 전병준

박상순의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평설 / 전병준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박상순 기차가 지나갔다그들은 피 묻은 내 반바지를 갈아 입혔다기차가 지나갔다그들은 나를 다락으로 옮겨 놓았고기차가 지나갔다 첫 번째 기차가 아버지의 머리를 깨고 지나갔다두 번째 기차가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지나갔다세 번째 기차가 내 눈동자 속에서 덜컹거렸고할머니의 피 묻은 손가락들이 내 반바지 위에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갔다나는 뒤집힌 벌레처럼 발버둥 쳤다기차가 지나갔다달리는 기차에 앉아흰 구름 한 점 웃고 있었다기차가 지나갔다 (1991년 《작가세계》 등단작) ...........................................................................

비평·에세이 2025.10.05

불안에 떠는 안전문 외 1편/정채원

불안에 떠는 안전문 투명한 방패는오늘도 열리고 닫히고 이쪽과 저쪽 사이안전문이 있고 철로가 있고 어둠이 있다켜켜로 닫힌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꿈누구나 꿀 순 있지만누구나 실행하진 못한다일정표는 오늘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고 투명한 얼굴 뒤에서 불투명한 얼굴이 흐느낀다 '안전'이라는 이름의 뿌리 깊은 감옥 궤도 이탈한 마음은 캄캄한 철로 위를 유령처럼 날아다니고 안전문 위의 시구를 반쯤 읽다가달려오는 열차를 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재빨리 일상에 올라타는 시민들 당신이 오늘의 당선작이다 오늘은 습작習作 죽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쓰자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울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자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울자 마침내 하늘에..

벽호는 밤에 운다/강인한

벽호는 밤에 운다 강인한 시골 버스 대합실 같은 공항오면서 저만큼 킬리만자로를 배웅하고잔지바르 섬.스톤타운 네모난 시멘트 방 검은 노예 다섯목에서 목 쇠사슬로 이었다. 넥타이처럼무릎까지 내려온 슬픔이멀리 에메랄드 바다를 따라가는희디흰 모래밭, 눙위어디선가 아득한 플루메리아 향기 왁자지껄 항구의 시장에서노점상이 망고를 싸준 종이는 조선일보였다. 숙소의 바깥벽에 잿빛 벽호들눙위 해안을 잘라깊은 밤에 운다. 재깍재깍 공항에서 압수하는 탄자니아의 파란 돌 하나.계간 《딩아돌하》 2025 가을호, 초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