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문은 조용히 닫혀 있다 일상이 제거된 일요일 저녁
또한 그 공간을 비추는 빛은 자연광과 인공광을 동시에 활용해 자연광의 그것만도 아니고 인공광의 그것만도 아닌 상태, 즉 자연광과 인공광의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또는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는 상태로 채색함으로써 현대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특유의 미묘한 감정들을 포착하고 재현해서 공감을 얻는 작업에 크게 일조합니다. 빛에 의한 공간 감정의 바탕 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요? 일상적인 생활과 일상적인 사람들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뿌리 없이 떠도는 사람들처럼 황량하기도 하고 삭막해 보이기도 합니다. 일상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어딘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그 외로움이나 쓸쓸함 때문에 일상이 무너질 사람들은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일들과 관계들을 잘 유지하며 살아갈지라도 그 내면에는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인 고독과 절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호퍼의 그림들이니까요. 에드워드 호퍼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고독과 절망을 그림으로 표현해 공감을 획득했다는 성취에 있는데요. 정채원 시인의 「소풍」도 호퍼의 그림을 보는 눈으로 호퍼의 그림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로 읽어보면 호퍼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호퍼와 유사하다'라는 표현은 시인에게 어쩌면 실례가 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르는데요. 그럼에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시를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그래서 그들에게 이런 시가 어렵지 않고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채원 시인의 「소풍」을 보면 "문은 조용히 닫혀 있"습니다. "새집 같은 아파트 거실"입니다. 거기서 "한 사람은 신문을 읽"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TV를" 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공간 안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일상은 공감과 소통이 없이 각자 따로따로입니다. "새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왔겠지만 그 이면에는 대화도 없이 함께 공유하는 것도 없이 제각각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두 사람 중에서 남자는 "먼 곳에서 지금 막 도착한 듯" 또는 "머지않아 어디론가 떠나려는 듯"보입니다. 그래서 "소파 끝에 반쯤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습니다. "막 도착한" 상태이면서 "어디론가 떠나려는" 상태인 "소파 끝에 반쯤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모습은, 앉았으나 일어서야 하고 쉬고 있으나 움직여야 하고 멈췄으나 출발해야 하는 인간의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을 유기적으로 함축해서 표현한 자세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도 나름의 설정이 있습니다. 남자가 "내뿜는 담배 연기"로 인해 "여자의 얼굴이 조금씩 지워"지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지만 전면에 드러나는 사람이 남자라는 것과 여자는 없다는 점에서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존재하고 기능하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 남자는 담배를 피우면서 연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시각적으로 여자의 얼굴이 안 보이게 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여자라는 존재가 남자에 의해 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습니다. 담배 연기에 의해 여자가 지워진다는 의미와 상징이 매우 큰 것이지요. |
남자와 여자는 "야트막한 원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서 "잔 꽃무늬 스탠드 불빛 아래" 서로를 마주보며 "코가 닿을 듯한"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장면은 아마도 남녀의 성생활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그런데도 입술이 닿는 것이 아닌 "코가 닿을 듯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 자체로 일상과 의식으로서의 외면과 내면이 서로 다른 감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몸과 반대되는 마음이나 감정의 매개로 작용하는 그림자에 관한 표현을 보면 사뭇 의미심장합니다. "한 그림자는 왼쪽 모서리에서 목이 꺾여 있"습니다. 그림자이면서 모서리에 걸쳐져 있으면 꺾이는 것이 당연하건만, 그리고 그림자를 표현한 것이지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표현이련만, 지금의 상황에 관한 내적인 묘사로 보면 참으로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그림자는 오른쪽 구석에 가슴이 접혀 있다"는 묘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슴을 접었으니 가슴을 결코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일 텐데요. 이렇게 목이 꺾이고 가슴이 접히는 그림자가 한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남녀의 실체가 아닌가 싶어서 충격을 넘어 끔찍하기까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을 테니까요. 두 남녀가 살아가는 공간의 "문은 여전히 닫혀 있"으니 두 사람은 앞으로도 외부와의 소통에 따른 변화가 전혀 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그 모양 그 방식 그대로 그렇게 살아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세상은 변화하면서 달라지는데도 문을 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독하고 쓸쓸한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일요일 저녁"은 단지 "일상이 제거된" 날일 뿐 아무 의미나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알려주는 "뻐꾸기가 울고 있"는 것입니다. "벽 위에서" 울고 있는 그 뻐꾸기 시계는 표면적으로는 시간을 알려주는 울음일 것이나 내면적으로는 그 남녀의 모든 시간들이 우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시 제목이 "소풍"입니다. 소풍이라는 말과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 이런 내용과 소풍을 연결해서 생각을 해보면 그 의미나 파장의 울림이 더욱 깊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즐거워야 할 소풍이 무엇으로 인해 또 누군가로 인해 망치게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정채원 시인이 「소풍」이라는 시를 통해서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요. 1연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문은 닫혀 있다'라는 상황과 공간 속에서, '인간은 누구인가, 남자는 누구인가, 여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관계를 이루는 부부로서의 남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되겠습니다. 그에 대한 해답은 오직 그림자로써 나타날 것이니, '당신의 그림자는 멀쩡한가 아니면 목이 꺾여 있는가, 당신의 가슴은 살아 있는가 아니면 접혀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당신이 해야 하겠지요. 앞으로는 나를 보지 말고 내 뒤에 있는 그림자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상대를 보지 말고 상대 뒤에 나타나는 그림자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면서 살아야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나가 나 자신이 아니고 뒤에 비치는 그림자가 진정한 나이니까요. 또한 눈에 보이는 상대가 상대 자신이 아니라 뒤에 비치는 그림자가 진정한 상대이니까요. 오늘부터 그림자를 조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림자를 잘 가꾸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림자를 잘 못 가꾸다가는 나의 남은 모든 시간들이 통곡하며 울 것이 뻔하니까요. 불을 끄고 잠드는 밤이 편안합니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시간이라서요. 내일의 그림자를 위해 오늘 밤의 그림자를 잠시 꺼두기로 합니다.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이종섶(시인,평론가)은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 '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부천타임즈 <이종섶의 詩장바구니> 연재중 |
'비평·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라지는 신체’ 혹은 사건의 순수한 흐름을 이끌어내는 문장/박성현 (0) | 2021.01.02 |
---|---|
사령(死靈)/김수영 (0) | 2020.12.22 |
구조주의로 시읽기(세계를 관통하는 문법을 찾아서)/ 오민석 (0) | 2020.07.31 |
이병률의 「망가진 생일 케이크」 감상 / 장석남 (0) | 2020.07.19 |
김경미의 「각도」 감상/문태준 (0) | 2020.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