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비평·에세이

사령(死靈)/김수영

Beyond 정채원 2020. 12. 22. 01:50

사령(死靈)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속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아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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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자로 진실을 표현하지 못하고 자유가 억압당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방관한다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이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다.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떨어지는 폭포의 기상을 동경했던 김수영에게 불의와 부정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공손하게 고개 숙이고 그저 고요하게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대의 정의"와 "우리들의 섬세"를 대비했지만 '섬세'가 아니라 '섬약'이며 비겁일 뿐이다.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비겁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치욕스러운 상황이다. 그래도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자신의 영은 죽은 듯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시인 자신을 포함한 일반인들의 양심의 죽음, 의식의 죽음을 '사령死靈'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발췌)

                                                                                                         이숭원 문학평론가

 

 

《시로여는세상》 2020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