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신체’ 혹은 사건의 순수한 흐름을 이끌어내는 문장
박 성 현
정채원 시인의 문장이 향한 곳은 뜻밖에도 “코를 비추면 무릎이 지워지는 아침나절과 / 옆구리를 비추면 머리가 사라지는 저녁”(「전신거울 파는 곳」)이다. 코를 비추는데 ‘무릎’이 지워지고, 옆구리를 돌렸는데 ‘머리’가 사라져버리는 그 이상한 ‘나라’는, 얼핏 보기에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물리적 영역과는 전혀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위하는 생활-세계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장소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라지는 신체’의 세련된 무질서는 결코 현실 바깥으로 옮겨간 적이 없는 ‘넌센스’ 혹은 ‘수수께끼’라는 것이 판명된다. ‘거울’이라는 한정된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재현 가능한, 일종의 마술로써 신체의 단절과 멈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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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는 수많은 영역들이 존재한다. 살아감의 ‘실존’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립되는 것인데, 이 ‘관계-맺음’의 각 영역들이 삶의 구체적 시간과 장소에 작용하면서 개별자들의 불안과 공포, 안도와 부끄러움 등의 기분을 만들어낸다. 더욱이 현실을 구성하는 사물들의 배치를 바꾼다면 얼마든지 낯설고 불가해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익숙함은 그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까닭 없는 공포로 즉각 돌변한다.
때문에 ‘현실’이란 시인이 정확히 판단하는 것처럼 ‘양가성’(ambivalence)의 세계다. 가벼우면서도 상당히 무겁고, 부드러우면서도 거칠기만 한 ‘늪’(혹은 ‘수렁’) 이미지를 강하게 내포한다. 이러한 이유로 현실은 항상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 작용을 통해 정립되며, 그 양상은 우리가 예측한 설계와 의도에 균열을 내고, 그것을 벗겨내는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계열화된다. 시인은 맥락을 수용하면서도 어느 틈엔가 그 맥락을 사건에서 제거한다. 그러다 보면 남는 것은 순수한 사건 그 자체인데, 바로 여기가 정채원 시인의 문장이 산출되는 곳이다.
요컨대, “제 안에 키우는 동굴 속, 이따금 빗물이 스며드는 날이면 어디론가 끝없이 달려가는 발굽소리 들린다. 뜻 모를 신음소리만 내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괴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詩라는 신神을 만들어 냈다고도 하는 // 꿈보다 수상한 해몽”(「진화론 P」)을 내놓는 것이지만, 시가 신으로 향하는 순간 문장에서의 시간은 멈추고 공간도 풍화되기를 거부한다. 그는 문장의 시점을 이동하거나 주어를 감춰두는 것만으로도 ‘고양이 없는 미소’의 ‘체셔 고양이’를 실현하는 것이다.
논의를 보다 정교하게 다듬기 위해 앞의 문장으로 한 번 더 이동하자. 이 문장의 낯섦은 시인이 맞닥뜨렸던 ‘거울’이 등장하는 순간 명백해진다. 거울은 사물을 비추는데 원근과 거리를 감안해 사물의 원래 모습을 잘라낸다. ‘거울’은 사물의 이미지에서 사각(死角)을 만들어냄으로써 존속한다. 2차원의 평면에 닿는 빛의 파편들은 명암이 분명해서 이면을 가두고 잘라낸다. 코를 비추면 무릎은 지워지는데, 동일한 방식으로 옆구리는 머리를 잘라낸다는 것. 이 단순하면서도 선이 굵은 기법은 영화사상 가장 오래된 편집기술이기도 하다. 어떠한 거울도 전신을 360도로 비추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하면 ‘사라지는 신체’의 수수께끼(혹은 넌센스)는 쉽게 풀리게 된다. 여기까지가 우리에게 허락된, 가시권에 배치된 시인의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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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과연 그러할까. 시인이 만들어낸 문장들이, 자물쇠를 풀었다고 해서 그가 지닌 비의들을 모두 쏟아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해서 질문이 가리키는 모든 방향을 짚어낸다고는 말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어쩌면 우리는 고성능 헤드라이트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너무 밝아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에 방치되고 있는 것인지도. 여하튼, 우리는 정채원 시인이 만들어낸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거칠고도 부드러운 미로의 초입에 서서 목적지를 분명히 만들기 위해 ‘거울’이란 갈피를 겨우 잡았다. 더욱이 우리의 “발밑에서 얼음 갈라지는 소리”(「북극의 8월」)가 들리지 않는가.
거울 앞이다. 잘려나간 ‘무릎’과 ‘머리’가 거울이 아닌 곳에서 둥둥 떠 있다. 한 곳을 집중하면 다른 한 곳은 방치된다. 이제 막 자리를 잡았는데 갑자기 없어지는 것이다. 거울의 마술은, 실재하는 것이 실재하지 않았다고 의심되는 순간 작동된다. 우리는 거울 앞에 있고, 현실을 움켜쥔 이미지들은 퍼즐처럼 흩어져 있다.
코를 비추면 무릎이 지워지는 아침나절과
옆구리를 비추면 머리가 사라지는 저녁
겨우 얼굴과 상반신만 비추는 거울이 걸린
현관을 지나
밖엔 태풍주의보
우산을 써도 우산을 쓰지 않아도
전신이 젖을 때
이 도시에 불시착한 사람들은
보송보송하던 날들을 떠올려야 할까
마냥 쏟아지는 비를 즐겨야 할까
살이 부러진 우산을 여전히 움켜쥔 채
패잔병처럼 비를 피하러 들어선 곳이
전신거울을 파는 곳이라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숨고 싶어도 숨을 곳이 없다
타인의 눈동자 속에서
살이 부러진 표정이 번들거리고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서도
반신은 숨길 수 있는 곳
젖은 손을 비추면 부르튼 발을 숨겨주고
구겨진 셔츠를 벗으면 뜨거운 미역국을 한 대접 내어주는
─ 「전신거울 파는 곳」 전문
코와 옆구리를 비추는데, 저 거울은 무릎과 머리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거울은 우리의 신체를 비추고 보이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분명하게 가려내기 때문인데, “겨우 얼굴과 상반신만 비”출 정도로 거울은 신체의 일부를 끊임없이 강탈한다. 사물은 거울이 수용하는 빛의 굵기와 각도에 따라 분명해지거나 반대로 모호해지면서 어느 순간에는 퍼즐처럼 조각나게 된다. 거울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사하겠지만, 입체가 평면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은 거울 속에 ‘삼투압’되고 만 것이다. 비추고 싶은 것만 비추겠다는, 거울의 묘한 속내가 시인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거울이 강탈한 신체를 주섬주섬 끼워 맞추며 현관을 나선다. 때마침 도시는 태풍주의보가 발효된 뒤라 강풍과 빗줄기가 한 몸으로 얽혀 뜨겁게 시위를 하고 있다. 뉴스에서는 초속 40m에 육박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소식도 계속 전하고 있다. 잔뜩 긴장한 채 우람한 근육을 뽑아내고 있는 바람이, 가로수를 뽑고 자동차를 밀면서 지나간다. 건물의 잔해들이 이곳저곳으로 날아다니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 상황에선 우산을 쓰나 안 쓰나 별반 차이가 없어진다. “이 도시에 불시착한 사람들은 / 보송보송하던 날들을 떠올”리겠지만, “마냥 쏟아지는 비를 즐”길 수는 없다. 전신이 젖어버렸으므로, 생활 또한 비에 흠뻑 젖어버릴 것이다.
비를 피하기 위해 시인은 어느 한적한 가게에 들어간다. 살이 부러진 우산을 움켜쥐고 패잔병처럼 숨죽이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는데, 다름 아닌 ‘전신거울’을 파는 곳이다. 다른 곳보다 유난히 밝고 강렬한 빛으로 가득했으므로 이곳에서는 한 뼘의 어둠에 속박될 까닭이 전혀 없으리라. 오전의 신체강탈자였던 작은 ‘거울’과는 다르게, 이 전신거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 숨고 싶어도 숨을 곳이 없”게 한다. 나의 표정에 찍힌 점조차 뚜렷하다. 더욱이 “타인의 눈동자 속에서 / 살이 부러진 표정이 번들거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도대체 ‘나’의 모든 것이 전신거울의 그 유별난 빛 속에 감금된 것이다.
‘전신거울’이라는 단어를 접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강력한 주술에 걸려들게 된다. 일종의 흑마술인데, 그 결계 안에서는 ‘사라지는 신체’라는 마술이 전혀 통하지 않으며, 우리의 낱낱은 구경거리로 돌변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그 ‘문장’은 전신거울을 매개로 할 때 확고한 의미를 획득하겠지만, 의미가 획정되자마자 오히려 모호해지는 상당히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만일 우리의 신체에 명암이 사라진다면 그것만큼 공포스러운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산발적으로 생성되고 흩어지던 의미들이 방향을 잡게 됨과 동시에 곧바로 금이 가면서 찢어지는 것으로 요컨대, 문장이 ‘전신거울’의 가시권 내에 들어서자마자 문장이 상영하는 이미지들의 무대는 다시 어둠 속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로써 ‘전신거울’은 뜻을 확정할 것이라는 우리가 예상과는 반대로, 문장 자체를 ‘의미-의-없음’ 혹은 비(非)-의미로 스스로를 돌려세운다. 시 전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되살아나는 ‘수수께끼’의 성채(城砦)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전신을 비춘다’는 말이 ‘전신을 드러낸다’라는 행위 속에서, ‘전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은밀한 욕망으로 미끄러지는 것과 같다. 마치 빛의 굴절이 사물을 왜곡시키고, 또한 ‘파놉티콘’(Panopticon)에서 가장 가시적인 영역이 오히려 비가시적 영역으로 판명이 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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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시인은 자기만의 ‘거울’이 있는 집으로 향해야 한다. 전신거울이 매개하는 ‘숨을-곳-없음’의 쓸쓸하고 맹렬한 ‘감옥’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시인에게 ‘집’이란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서도 / 반신은 숨길 수 있는 곳 / 젖은 손을 비추면 부르튼 발을 숨겨주고 / 구겨진 셔츠를 벗으면 뜨거운 미역국을 한 대접 내어주는” 곳이어서, 우리는 집과 함께 내면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집’은 ‘거울’과 대칭을 이루며 절대적으로 상통한다. 의미가 비-의미로 전이되고(그 역도 가능하다), 수수께끼와 넌센스가 정교하게 빚어짐으로써 문장이 활기를 얻게 되는, 이 이상한 나라의 낯설고도 불가해한 모퉁이는 의외로 주체의 내면을 활짝 열었던 체셔 고양이의 ‘고양이 없는 미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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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향한다. 내 모든 낱낱이 가감 없이 노출되는 건 몹시도 불행한 일이다. 전신거울이 시인을 비쳤을 때 느꼈던 불편함의 정체가 그것이었다. 시인은 집을 나올 때 비쳤던 작은 거울들을 떠올리고는 자신의 젖은 몸을 숨길 수 있는 ‘다락’과도 같은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집은 “손톱으로 긁은 벽화”에 찍힌 “불긋한 핏자국 같”(「진화론 P」)다. 동굴 밖으로 나가려다 방향을 잃고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고 말았을 때 마침내 발견한 ‘헤테로토피아’다.
하지만, 발길을 돌리고 걷기 시작했을 때, 시인이 마주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투명하고 명백한 목적과 그 일에 골몰하는 표정들에 덧칠된 생(生)의 쓸쓸함이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과
어디선가 막 도착한 사람들
아침부터 밤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람처럼
밤부터 아침까지
뜬눈으로 무언가를 기다린 사람처럼
매일 9시에 인형이 나와 춤을 추는
역사의 시계탑 아래
모자를 쓰고 가방을 끌고 우산도 없이
빵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춤추는 인형을 기다리다
더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과
기다리지 않았어도 약속한 듯 마주쳐
잠시 함께 춤추다 스쳐가는 사람들
사과 한 알을 쪼개 나누고
몇 알의 사탕을 부스럭거리며 껍질째 건네다
문득 시계를 바라본다
광장에는 역이 있고 상점가가 있고 그 뒤엔 교회가 있고
그리고 병원이 있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은 춤출 수 있는 인형처럼
캄캄해져도 아파도
떠나지 않는 사람들, 시계 뒤에 못 박혀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생각한다
먼저 떠난 사람들은 지금쯤
천만 광년 떨어진 나라
어느 먼 시계탑에서
종을 치거나 북을 치고 있을까
지난밤에도 한밤중 자다 깨어
느닷없이 춤을 춘 사람이 있고,
팽팽한 대낮 뙤약볕 아래
주차 문제로 처음 보는 사람과 드잡이를 하다 말고
한숨 쉬며 춤을 춘 사람이 있다면
먼저 떠난 사람들이 아득히 먼 별에서
제 흩어진 뼈마디를 모아 치는
종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누구든 떠나야 할 이 별에서
─ 「하루에 두 번씩은 춤을」 전문
시인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시청을 지나 소공동 아케이드에서 잠시 머물렀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 남대문 시장을 돌았고 남산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와 중앙역으로 갔다. 시인은 걸으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쳤고 그들의 냄새와 목적과 일들을 살펴봤다. 모두들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바쁘다. 사람과 도로와 교통이 집중되는 중앙역에서 그는 이 행성이 도대체 얼마만큼 크고 넓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확장 혹은 양적 팽창이란 반복의 지겨움을 수반하므로 덧없을 뿐이다. 그것은 전신거울이 나의 모든 신체를 비추고 고정시키는 것과 동일하다. 나는 ‘전신거울’에 속박된 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밀어낸 경험을 기억했다. 그것만큼은 용인하기 어렵다.
다시 중앙역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움직이고 있다. 자동차는 빠르고, 지하철은 훨씬 더 빠르다. 시인은 중앙역이 나무의 ‘옹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행성(혹은 도시)과 다른 행성을 연결하는 접점으로서의 중앙역은 늘 무엇인가 끊임없이 생산해야 하는데, 어느 한 곳이라도 꺾여 부러지기라도 하면 그 주위는 활기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성장의 멈춤은 생명의 정지와도 같다. 그러니까 중앙역은 늘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과 / 어디선가 막 도착한 사람들”로 분주한 것이다. 시인은 보풀을 뜯어내듯 그들을 살핀다. “아침부터 밤까지 /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이거나 “밤부터 아침까지 / 뜬눈으로 무언가를 기다”렸다는 조바심도 단단히 박혀 있다. 중앙역에서 시인은 그들을 분별한다. 중앙역을 운영하는 관리자들을 제외하면, “매일 9시에 인형이 나와 춤을 추는 / 역사의 시계탑 아래 / 모자를 쓰고 가방을 끌고 우산도 없이 / 빵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과 “춤추는 인형을 기다리다 / 더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과 / 기다리지 않았어도 약속한 듯 마주쳐 / 잠시 함께 춤추다 스쳐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활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중앙역은 오히려 더 분주하다.
시인은 사과 한 알을 쪼개 나누고 몇 알의 사탕을 꺼내들었다.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다. 문득 역사의 시계를 바라보는데, 광장을 중심으로 중앙역과 상점가와 교회, 병원이 가지런히 이어져 하나의 선분으로 정착된 것이 눈에 보였다. 행성(혹은 도시)은 유기체와도 같아 심장을 통해 피를 나누는 것이다. 중앙역은 행성의 심장이다. 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생각을 읽기 시작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은 춤출 수 있는 인형처럼 / 캄캄해져도 아파도 / 떠나지 않는 사람들, 시계 뒤에 못 박혀 /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생각한다 // 먼저 떠난 사람들은 지금쯤 / 천만 광년 떨어진 나라 / 어느 먼 시계탑에서 / 종을 치거나 북을 치고 있을까”라고. 그들의 문장은 희고 간결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송출하지만, 대부분은 버려지고 다시 소환된다. 감출 수 있으면 감추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난밤에도 한밤중 자다 깨어 / 느닷없이 춤을 춘 사람이 있고, / 팽팽한 대낮 뙤약볕 아래 / 주차 문제로 처음 보는 사람과 드잡이를 하다 말고 / 한숨 쉬며 춤을 춘 사람이 있”는 것이지만, 모두 은밀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거울은 신체의 일부라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고, 욕망은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떠난 사람들이 아득히 먼 별에서 / 제 흩어진 뼈마디를 모아 치는 / 종소리”란 ‘사라지는 신체’의 세련된 무질서의 완곡한 표상이다. ‘양가성’으로 점층되는, 가벼우면서도 무겁고, 부드러운 표면과 거친 이면이 함께 존속하는 ‘수렁’(혹은 ‘늪’)이다. 바로 죽음과 삶의 동시성이다. 시인은 정확히 자신에게 들이닥친 시간의 문제를 ‘죽음’의 입장에서 살펴본다. “발밑에서 얼음 갈라지는 소리”(「북극의 8월」)가 들릴 때마다, 수수께끼 혹은 넌센스로 가득한 삶의 모순들을 짚어내는 것이다. “별별 요철이 다 있는 별에서 / 신神은 늘 공평하다고 / 이쪽 문이 닫히면 저쪽 문이 열린다고 / 별별 신들이 다 유튜브를 찍는 별”(「별별 무슨 별」)과 다를 것 없다.
시인이, “발굽을 숨긴 채 / 끝 모를 만장굴을 키우는 자들”(「진화론 P」)으로서 이 행성(혹은 도시)에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날마다 몰아치는 무수한 사건에서 신체를 사라지게 하듯 그 맥락을 제거하면서 사건을 순수한 흐름 그 자체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의 문장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자유롭게 흘러 사람들의 심장에 닿을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정채원 시인이 우리에게 던진 시의 화두가 아닐까. (*)
《열린시학》 2020년 겨울호, 정채원 시인 시평 - 박성현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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