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맨드라미의 심연/김승희

Beyond 정채원 2021. 5. 5. 15:13

  맨드라미의 심연

   김승희

 

 

   영화 같은데 영화는 아니었다

 

   뱅크시의 낙서 그림 같은 콘크리트 벽에 그려진

   부러진 횡경막과 다친 심장의 빨간 피

 

   결코 분업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

   나의 고통은 연년세세 나만의 고통인데

   갑자기 붉은 맨드라미 꽃밭이 두 팔을 살짝 들고 나만 들리게 부르는 것 같았다

   만세는 함께 부르는 것 같지만 실은 혼자씩 부르는 것이다

 

   울고 울고 울다가 스스로 끓는 물이 되어 한 톤 트럭의 달걀을 다 삶은 물불 모르는 눈물이 있었다

   온 천지가 빨간 불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갑자기 온몸에서 불이 난 빨간 불이 되었다

   맨드라미의 심연 같은 환희의 약용의 힘!

 

   사랑을 깨닫기까지 욥기 42장이 걸렸습니다

 

 

 

  감자꽃이 싹트는 것

 

   감자를 깎으려고 지하실 푸대에서 감자를 꺼냈을 때

   주렁주렁 딸려 나오는 무슨 주먹 같은 것

   쭈글쭈글한 주먹마다 보라색 꽃순이 싹텄는데

   감자에서 싹이 나서 감자꽃

   독을 머금고 꽃이 피어난 감자는 못 먹는 감자래

   꽃이 독을 품은 거라

   (가시가 많은 꽃이 색깔이 진하다는데)

   어떤 마음을 먹고 주먹을 꽉 쥐고 숨었길래 독이 꽃이 되었을까?

   내가 힘은 없지만 꼭 너를 죽여야겠다고

   감자 속에 숨은 마음이 주먹이 되어서

   주렁주렁 감자가 보라색 꽃순을 피웠는데

   증오는 너무 자해적이야

   독이 생활 속에 스며들어 감자가 보라색 꽃을 피웠다

   꽃이 핀 감자는 못 먹는 감자

   무수한 주먹들이 서로 목을 감고 뒤엉켰다

 

   생활이라는 것

   때로 주먹을 활짝 펴서 양산처럼 빛을 받아야 하는데

   꽉 쥔 주먹이 펴지지가 않아서

   베란다에 앉아 가위로 손가락을 하나하나 오리고 있다

   때로 도심의 지붕 아래 감자 푸대를 말려야 하는 임상적 이유

   썩은 감자들을 베란다 한곳에 몰아놓았더니

   주먹들이 발악을 했는지 봉분만한 보랏빛 꽃밭을 이루었다

   주먹만 한 감자에서 싹이 터서 감자꽃

   뭐랄까,

   자전을 하면서 공전도 하는 그런 삶이어야 한다고 했다

 

 

 

   《공정한시인의사회》 2021년 5월호

'밤의 네 번째 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흔 4/조정인  (0) 2021.06.02
새점/김명서  (0) 2021.05.17
못 견딜 얼굴이어도 다시 잃을 사랑이어도/박장호  (0) 2021.05.01
물의 정물靜物/기혁  (0) 2021.04.10
약국을 지나다/최정례  (1) 2021.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