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흔 4
-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
조정인
부재하는 연주자의 활이 내 안의 검은 악기를 켠다.
그의 활에서 쏟아지는 페이지들.
내 기억의 해저에는 글자가 휘발된 책이 한 권 있다.
오직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꿈과 같은 책.
어제의 기억을 보는 일과 어제의 꿈을 보는 일은 다르지 않다.
꿈의 옷을 입은 이 책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자라진 자신을 보여주고 자신을 듣게 한다.
시간의 간유리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것은
저쪽이 이쪽을 간섭하는 무늬들의 춤.
읽는 일을 통해서 발생한 꿈의 입자와 파동이
부단히 연합하고 나뉘며 그려내는
무형의 춤.
이 춤의 제1공여자는 작가이다.
그가 고인이든 현존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리고 방화放火.
그가 가진 불이 새파랗게 불붙어
내가 한 장 미농지처럼 타오르던 그 겨울을 어떻게
그와 내가 열애의 관계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파》2021년 여름호, 조정인 소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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