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책소식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이윤설 시집

Beyond 정채원 2021. 10. 17. 09:15

 

  시인의 말*

 

   축 생일

   ㅡ 크리스마스 예수님과 복숭이 오신 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안 오신 것보다 낫다.

   부처님이 오신 것이 안 오신 것보다 낫고

   복숭이가 온 것이 안 온 것보다 낫고

   내가 온 것이 안 온 것보다 낫다.

   인간으로 살아봤고 꿈을 가져봤고 짝도 만나봤고

   죽어서 먼지가 될지 귀신이 될지 우주의 은하수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온 것이 안 온 것보다 낫다.

   허나 다시 오고 싶지는 않다.

 

 

 

   2019년 12월 25일

   이윤설

 

 

 

  남몰래 수영장

 

  아마 너의 가슴속에도 이따만한 푸른 수영장이 있을 거다

  천장 벽 타일을 짜랑짜랑 울리는 아이들과

  버들치나 송사리들을 닮은 조그만 물고기를 가지고 있을 거다

  너는 그렇게 살아온 거다 수영장 하나를 가슴속에 빠뜨려놓고

  넘치지 않게 너의 조그만 물고기들이 헤엄을 다 배울 때까지

  뜨거운 한낮 땡볕 아래서도 천천히 걸어갔을 거다  너는 얼마나 가득 푸른 슬픔으로 출렁거렸는지

  아무도 아무도 몰랐을 거다

  너는 구별되지 않도록 흔하게 굴었을 거다

  가끔 네가 가진 조그만 물고기들이 첨벙 솟구치다 비늘을 떨어뜨린다면

  조금 더 평소와는 다르게 웃었을 거다

  휘청거리는 반 스텝의 엇갈린 보폭 속에서

  아찔한 홍수의 상상이 너를 조마조마 졸이게 했을 거다

  너는 평생토록 피치 못할 것을 지니고 살았을 거다

  네 눈물이 그래서 한 번도 흘러내리는 것을 사람들은 본 적이 없었을 거다

  푸른 수영장 속으로 속으로 흘러들어가 고인 수심을 오직 너만이 알았을 거다

  조그만 물고기들이 헤엄을 다 배워서

  어느 날 너는 사각 얼음갑처럼 몸을 꾸깃, 비틀어서는

  물고기들을 바다에 놓아주었다 솨아아 솨아아

  파도의 선을 물고기들은 잘도 잘도 넘어갔을 거다

  너는 태어나 처음으로 울음을 밖으로 울어보았을 것이다

  왜 이런 인내가 필요한 게 인생이라고 말해야 하는지 너는 몰랐을 거다

  몰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은 바다를 우리가 헤엄쳐 건너지 못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거다

  너는 수척해져 한결 주름질 것이고

  물고기는 아주 먼 나라의 어부에게 붙잡혀 값싸게 팔려 나갔을 것이다

  그게 눈물의 물고기라는 것을 모르는 누군가는 그 살점을 깊이 베어먹고

  솨아아 솨아아 슬픔이 목까지 차올랐을 거다

  뜻 모를 눈물을 저녁 밥상 앞에서 흘리다가 왜 자신은 남과 달라야 하는지 상심할 것이다

  버들치도 송사리도 아이들도 남몰래 남몰래 그의 가슴을 누비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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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으로 보면 멀쩡해 보이는 우리, 슬픔을 참고 참으며 홀로 견뎌내는 우리, 왜 이런 인내가 필요하냐는 말에 시인은 대답해줍니다. 그건 우리 안의 버들치와 송사리가 헤엄을 배울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 거야. 네가 비로소 둑이 터지듯 울면 수영장의 물도 넘치고 그 작은 아이들이 물살을 타고 바다까지 헤엄쳐나가겠지. 네가 인내하지 않았다면 그 아이들은 휩쓸려 죽고 말았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바다로 가게 해야지. 그 시간을 위해 우리는 남몰래 참아온 게 아닐까 ......

(...)

   시적 공간을 이처럼 다채롭고 크게 크게 활용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이럴 때에 이윤설의 상상력은 활짝 피어나고 빛나게 되지요. 상상력의 과감함과 전개의 속도감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고요. 입담 또한 일품이어서 생명력 가득한 단어들이 이윤설의 시 안에서는 제자리를 찾아 어울렁더울렁 조화를 이룹니다.

(...)

   이 거침없는 상상력 덕분에 시가 담아내는 아픈 내용과는 달리 이윤설의 작품에는 항상 생생한 활력이 부여됩니다.

 

                                                        시집 해설 「꽃밭 속에서 하하하」,박상수(시인, 문학평론가) 중에서 발췌

 

 

 

이윤설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문학동네 시인선 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