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자각夢, 정채원

자루는 없다/정채원

Beyond 정채원 2021. 12. 18. 13:55

  자루는 없다

   정채원

 

 

   그 자루를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내 안에 넣고 다니는 듯도 하다 자루 속에는 콩이 가득 들어 있다는 말도 있고 말똥만 가득 차 있다는 말도 들은 것 같다 한밤중이면 그 말똥은 말로 바뀌어 거친 숨소리를 내며 좁은 자루를 뚫고 나갈 듯 달리고 달리다가 아침이면 말똥만 수북이 남겨두고 어디론가 홀연 사라진다고 한다 나는 그 자루를 찾겠다고 기어이 그 안에 든 것을 밝히고야 말겠다고 몇 백 년째 이렇게 밤잠을 설치고 있다 TV를 보다가도 화장실에 있다가도 어디선가 못 듣던 말소리가 나면 부리나케 뛰어나온다 두리번거린다 자루가 나타났나 보다 드디어 껍질을 깼나 보다 마침내 그분이 오셨나 보다 그러나 어디에도 자루는 없다 천 년 사찰에서 혹한에 면벽을 하던 노스님도 끝내 자루를 만나지 못했고 두개골 속에 도서관을 세웠다던 그 철학자도 끝내 자루를 거머쥔 적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그들의 자루도 함께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내가 찾는 자루도 내가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어디선가 나를 자꾸 부를 것이다 밤마다 말똥만 한 자루 남겨놓고 떠날지라도 쉬지 않고 내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나는 이따금 그 말을 받아적는 것으로 타는 갈증을 달래며 산다

 

 

《예술가》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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