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피로
- C에게
인적이 드문 바다에 떨어지길 바래
캄캄한 너의 우주에서 홀로 폭발할 때
멸종위기인 일각고래의 먹이가 되어
기억의 반짝이는 조각들로
헛헛한 그의 뱃속을 채워주길 바래
밀렵꾼들은 뿔만 뽑곤
일각고래를 바다로 돌려보냈지
산 채로, 죽으라고
그리고 먼 훗날
가슴속에 뿔 돋힌 짐승 화석이 되어
그 뿔론 결국 자신을 찌를 뿐이었다는 걸 알게 될 때까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게 될 거야
눈물에 섞인 시간들이
그 진화를 재촉할 지도 모르지
너의 식습관과 웅크린 수면 자세까지
암벽화에 흔적을 남길 수도 있어
5도만 기울어진 채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고 버티는 피사의 사탑처럼
구경거리가 된다 해도 결코 쓰러지진 않길 바래
내 안의 어둠에 거꾸로 매달린 내가
어떤 해답으로도 결정되지 못한 채
야맹증이 점점 깊어갈 동안
표정을 삼키다
울다가도 하품할 수 있는,
웃는 건지 침을 흘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을 가진 자
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때론 기도하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진흙탕을 건너는 자
고단한 육신으로 풀을 매고
쓰러진 자에게 손을 내밀기도 하는
빗소리를 들으며 손끝으로 살짝 눌러도 가슴에 반짝 불이 켜지다가 갑작스런 암전에 힘주어 눌러도 내내 캄캄 절벽인
뛰어넘을 수 없는 음계를 가진 낮과 밤, 모른 척 삼킬 수 없는
비바람과 폭설과 눈을 찌르던 그 태양과 눈물로
웃어도 울어도 눈과 입술은 점점 삐뚤어지고
표정 위에 표정이
표정 아래 표정이
몇 겹의 그림자를 만들고 영혼에 요철을 새겼지
컨베이어 벨트에 쉴 새 없이 실려 오던 어제와 내일을
기쁨은 아니지만 슬픔도 아닌 것으로 애써 해체하던 시절
그러니까 얼굴이 있는 것들, 결코 고통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더라도 꿀꺽 삼켜버리면 안 된다니까
도살장에 끌려가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 표정들이 켜켜이 쌓여 꽃등심을 이루는 건지 모르지만
한오백년 익힌 웰 던 스테이크처럼
화석이 된 기억의 조각들을
포크로 한 점 찍어 곱씹어도
내 입술엔 여전히 피가 묻어난다
《시현실》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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