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자각夢, 정채원

연민 피로 외 1편/정채원

Beyond 정채원 2022. 1. 12. 22:28

연민 피로

- C에게

 

 

 

인적이 드문 바다에 떨어지길 바래

캄캄한 너의 우주에서 홀로 폭발할 때

 

멸종위기인 일각고래의 먹이가 되어

기억의 반짝이는 조각들로

헛헛한 그의 뱃속을 채워주길 바래

 

밀렵꾼들은 뿔만 뽑곤

일각고래를 바다로 돌려보냈지

산 채로, 죽으라고

 

그리고 먼 훗날

가슴속에 뿔 돋힌 짐승 화석이 되어

그 뿔론 결국 자신을 찌를 뿐이었다는 걸 알게 될 때까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게 될 거야

 

눈물에 섞인 시간들이

그 진화를 재촉할 지도 모르지

 

너의 식습관과 웅크린 수면 자세까지

암벽화에 흔적을 남길 수도 있어

 

5도만 기울어진 채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고 버티는 피사의 사탑처럼

구경거리가 된다 해도 결코 쓰러지진 않길 바래

 

내 안의 어둠에 거꾸로 매달린 내가

어떤 해답으로도 결정되지 못한 채

야맹증이 점점 깊어갈 동안

 

 

 

 

표정을 삼키다

 

 

울다가도 하품할 수 있는,

웃는 건지 침을 흘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을 가진 자

 

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때론 기도하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진흙탕을 건너는 자

 

고단한 육신으로 풀을 매고

쓰러진 자에게 손을 내밀기도 하는

 

빗소리를 들으며 손끝으로 살짝 눌러도 가슴에 반짝 불이 켜지다가 갑작스런 암전에 힘주어 눌러도 내내 캄캄 절벽인

 

뛰어넘을 수 없는 음계를 가진 낮과 밤, 모른 척 삼킬 수 없는

비바람과 폭설과 눈을 찌르던 그 태양과 눈물로

웃어도 울어도 눈과 입술은 점점 삐뚤어지고

표정 위에 표정이

표정 아래 표정이

몇 겹의 그림자를 만들고 영혼에 요철을 새겼지

 

컨베이어 벨트에 쉴 새 없이 실려 오던 어제와 내일을

기쁨은 아니지만 슬픔도 아닌 것으로 애써 해체하던 시절

 

그러니까 얼굴이 있는 것들, 결코 고통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더라도 꿀꺽 삼켜버리면 안 된다니까

 

도살장에 끌려가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 표정들이 켜켜이 쌓여 꽃등심을 이루는 건지 모르지만

 

한오백년 익힌 웰 던 스테이크처럼

화석이 된 기억의 조각들을

포크로 한 점 찍어 곱씹어도

내 입술엔 여전히 피가 묻어난다

 

 

《시현실》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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