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근황의 세계/강영은

Beyond 정채원 2021. 12. 29. 06:57

근황의 세계

 

   강영은

 

 

솔직히 말한다

 

나는 네가 먼 별로 떠난 것을 믿지 못한다.

 

지구가 푸른 유리구슬 같다고 우주선을 탔던 사람들이 돌아와 말했을 때

너와 나는 지구에 불시착한 바이러스라고그러니, 떠난다는 말은 하지 말자고,

바이러스 천국을 용서했잖니?

 

솔직히 말하자

 

나는 너를 볼 수 없고 너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힘내, 라고 위로해봐도 나는 너에게 따뜻한 서정시 한 편 건네기 어렵고

사랑해, 속삭여 봐도 너를 사랑한 일이 거짓인 것 같다
 
기다림의 정서는 풀만 무성한 벌판, 기다리는 방식은 풀피리가 되는 일
​묻는다. 들판에 퍼지는 풀피리 소리가 너는 좋으냐!
 
솔직히 말한다
 
햇살은 어제보다 더 투명해지고
여름에서 가을로, 새를 날려 보낸 ​나무는 계절을 새로 만드는데  
근황의 세계는 기다림이 시드는 세계, 서정이 사라진 세계여서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을뿐
     
 

 

 

*브레히트의 詩,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불가능하다’에서
 

 
 
계간『시와 정신』 2021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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