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에버그린Evergreen/박수현

Beyond 정채원 2021. 12. 18. 14:02

에버그린Evergreen

 박수현

 

그 옛날처럼 가슴에 이름표를 달았지

먼저 떠난 친구를 위한 묵념은 언제 했냐는 듯

이내 웃고 떠들며 술잔이 뒤엉켰지

구석진 테이블에서 별안간 

폐타이어로 만든 슬리퍼 갈기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지

동창회엔 잘나가다 꼭 파투치는 작자도 있어야 하는 법,

욕설이 튀어 오르고

허풍장이 P가 땡감 씹은 얼굴로 싸움에 끼어들고

짐승의 비명 같은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꺼억 ~꺽 울음소리도 흘러나왔지

창밖엔 튤립 향기보다 짙은 어둠이 내리고

학창시절 자칭 가수였던 L이 불콰한 얼굴로

다시 마이크를 잡고 evergreen을 불렀지

~But when it's evergreen evergreen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웅얼웅얼 멜로디는 합창처럼 번지다 낮게 잦아들었지 

영원할 것 같은 싱싱한 함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제 각기 끌고 온 등 뒤의 길들이 모닥불처럼 타오르다 스러지고

별 볼일 없는 물음표 같은 것이 

할 말 많은 느낌표 같은 것이 

빽빽한 침묵이 늘어선 말없음표 같은 것이 

저 멀리 밤하늘에 흩어졌지

ever ever 상록수보다 더 푸른, 졸업 40주년 기념 축제가

잠시 공중에서 명멸하던 폭죽처럼

사라지며 캄캄해졌지

 



《창작 21》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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