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그린Evergreen
박수현
그 옛날처럼 가슴에 이름표를 달았지
먼저 떠난 친구를 위한 묵념은 언제 했냐는 듯
이내 웃고 떠들며 술잔이 뒤엉켰지
구석진 테이블에서 별안간
폐타이어로 만든 슬리퍼 갈기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지
동창회엔 잘나가다 꼭 파투치는 작자도 있어야 하는 법,
욕설이 튀어 오르고
허풍장이 P가 땡감 씹은 얼굴로 싸움에 끼어들고
짐승의 비명 같은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꺼억 ~꺽 울음소리도 흘러나왔지
창밖엔 튤립 향기보다 짙은 어둠이 내리고
학창시절 자칭 가수였던 L이 불콰한 얼굴로
다시 마이크를 잡고 evergreen을 불렀지
~But when it's evergreen evergreen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웅얼웅얼 멜로디는 합창처럼 번지다 낮게 잦아들었지
영원할 것 같은 싱싱한 함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제 각기 끌고 온 등 뒤의 길들이 모닥불처럼 타오르다 스러지고
별 볼일 없는 물음표 같은 것이
할 말 많은 느낌표 같은 것이
빽빽한 침묵이 늘어선 말없음표 같은 것이
저 멀리 밤하늘에 흩어졌지
ever ever 상록수보다 더 푸른, 졸업 40주년 기념 축제가
잠시 공중에서 명멸하던 폭죽처럼
사라지며 캄캄해졌지
《창작 21》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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