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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네 번째 서랍

개 한 마리의 지구력/황성희

Beyond 정채원 2021. 12. 18. 18:42

개 한 마리의 지구력

 

황성희

 

 

 

관사를 지키던 개가 쥐약을 먹고 자꾸 죽어 나갈 때
천장의 쥐들이 그토록 피해 달아난 건 무엇이었을까


달이 뜬 마당 가득
검은 자정이 차오르면


나는 목줄을 끌며 대문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개를
살며시 열어놓은 방문의 좁은 틈으로 지켜보았다


개는 자신이 개라는 사실에 흥분한 듯도 보였고
두려운 듯도 보였고 견딜 수 없는 듯도 보였다


너덧 발짝도 안 되는 짧은 쇠줄의 세계 안에서
귀 안으로 쏟아지는 밤의 소리를 주워 담으며


경쾌하기 짝이 없는 발자국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마치 땅에다 새겨넣는 주문 같았다


제발 변해라
쥐약을 먹기 전에, 내가 아닌 그 모든 것으로


열린 방문의 좁은 틈 사이로 나와 눈이 마주친 개는
무언가 들킨 듯 정지하더니 다시금 걸음을 내디딘다


쇠줄이 당겨질 때마다 멈추지만 곧 다시 나아간다
지조란 그러한 것, 한 방향에 대한 모진 습관 같은 것


개는 혀를 내밀어 양쪽 입가를 교대로 핥아 내린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너무 아무렇지 않게 보이잖아


개는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대신
네 발을 쉼 없이 내디디며 시간을 밀어낸다


오로지 자신이 지닌 개 하나만으로
자신의 모든 개를 버텨내고 있었다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웹진》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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