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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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들은 모두 새가 되었다/최금녀 시집

Beyond 정채원 2022. 5. 7. 00:48

 

불광동

 

불광동은

새로 산 신발처럼 불편하고

조금씩 헐거워지고

봄에도 눈이 질퍽거렸다

 

발이 아플 때마다 마음이 아플 때마다 눈이 내렸다

발이 아픈 곳에서 눈이 다시 시작됐다

미끄러지는 발을 자주 씻었다

 

생각은 밤거리에 있었고

내 발은 눈 속에서 얼었다

 

불광동에서 나는 사랑 시를 썼다

 

 

서쪽을 보다

 

우리는 동쪽에 있다

 

남편은 늘 동쪽 벽에 기대어 앉아

서쪽 벽을 보고 있다

 

액자 속 인물들은 표정을 바꿀 생각이 없다

40년 된 소철은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다

 

반가운 적이 없는 기억들이

꽃 진 화분에서 기어 나와

틈새를 찾아다니며 핀다

 

르누아르의 여자는 그림 속에서도 르누아르를 사랑한다

꼭 하고 싶은 말은 냉동실에 넣어두고

죽음은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정장 차림으로 날씨를 읽는다

 

서쪽 벽은 늘 춥고 어둡다

바라보는 중이다

 

 

제30회 공초문학상 수상작

 

 

최금녀 시집 기둥들은 모두 새가 되었다』 , 현대시 기획선 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