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제5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하나이면서 둘, 여럿이면서 하나/고봉준

Beyond 정채원 2022. 7. 14. 18:16

 

 

 

 

하나이면서 둘, 여럿이면서 하나

 ‒정채원 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해설

 

          고  봉  준

 

 

   1.

 

   예술은 반복을 통해 스타일을 창조한다. 스타일이 예술가 개인의 고유명, 즉 서명(sign)과 같은 것이라면, 거기에는 이미-항상 반복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정한 어휘, 대상, 소재, 이미지, 그리고 모티프(motif)……. 모든 반복에는 징후적 가치가 있다. 음악과 회화에서의 반복이 스타일 - 우리가 낯선 그림을 보고 특정한 화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반복 때문이다 - 과 연관된다면, 시에서의 ‘반복’은 시인의 리비도(libido)와 연결된다. 특정한 사물에 리비도를 반복적으로 투사한다는 것, 그것은 시인-주체의 자율적인 운동이 아니라 그가 대상에 매혹 내지 포획되어 있다는 징후이다. 정채원의 시에서 반복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시집의 초반부에 배치된 작품들을 잠시 살펴보자. 먼저 「모래 전야, 야전」. 이 시는 4연의 “우리는 서로 리모컨을 차지하려고”라는 진술을 경계로 양분할 수 있다. ‘우리’와 ‘리모컨’이라는 어휘가 암시하듯이 시인은 지금 누군가와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에 등장하는 장면들, 가령 “까마귀가 파먹은 거북의 눈구멍”, “후손을 남기기 위해/목숨 걸고 떼 지어 이동하는 홍게”, “백신이 없는 도시를 가시로 품고 있는/회오리 선인장” 등은 텔레비전 장면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자연 다큐멘터리로 추측되는 이들 장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생(生)과 사(死)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거북의 눈구멍을 파먹는 까마귀, 목숨을 걸고 이동하는 홍게, 새끼에게 사냥을 가르치는 어미 치타에게서 치열한 생존 투쟁,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생명체의 운명을 읽고 있다. 시인은 뜨거운 모래 위에서 펼쳐지는 그 투쟁에 ‘모래 전야, 야전’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것은 ‘전야-야전’의 형태적 대칭성을 활용하면서도 ‘전쟁’을 강조한 것이라고 읽을 수 있다. 한편 동물들의 생존 투쟁이 펼쳐지는 반대편, 즉 텔레비전 바깥에서는 ‘우리’가 “서로 리모컨을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다. 리모컨을 갖는다는 것은 결정권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그것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세상을 제압”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만든 문명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먼저 이 시에는 삶과 죽음이 대칭을 이루면서 공존하고 있다. 다음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경계로 문명과 자연, 인간과 동물이 대칭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방식은 다를지언정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싸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욕망은 동질적이다. 대칭(Symmetry)이란 같이(sym)+측정(metry)한다는 것, 즉 변화와 불변성을 함께 함축한 개념이다. 정채원의 시에는 이러한 대칭적 관계의 모티프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이질적인 두 극단이 대칭적 관계의 방식으로 엮여 있음을 드러낸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모래 전야, 야전」의 6연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1~5연의 내용과 동떨어진 하나의 장면을 외삽(外揷)하고 있다. 경전에 날개가 끼어 말라 죽은 나방의 모습이 그것이다. 여기에선 나방의 몸 전체가 아니라 일부인 ‘날개’가 끼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특이한 형상은 다음의 진술, 즉 “어디까지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알 수 없다”라는 진술로 이어진다. 몸의 일부는 경전 안에, 나머지는 바깥에 있을 때, ‘안’과 ‘밖’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그것은 ‘안’과 ‘바깥’ 가운데 어느 하나에 있다고 말할 수 없고, 또한 ‘안’과 ‘바깥’ 모두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안’과 ‘밖’이라는 이항 대립, 즉 공간에 대한 익숙한 구분을 위태롭게 만든다. 경전에 날개가 끼여 말라 죽은 나방의 형상은 ‘안’과 ‘밖’이라는 두 극단을 대칭적 관계를 통해 하나로 통합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합은 두 극단이 선명하게 구분된다는 우리의 상식적인 믿음을 뒤흔든다.

 

 

      한번 녹았던 마음이 다시 얼어붙으면 흉기가 된다

      그림자 속에서도 애써 꽃을 피우다가

      화분을 내동댕이치다가

 

      눈보라치는 밤, 얼어붙은 기억의

      터널을 지나면 교각이 있고, 교각을 지나면 또 터널이 있다

      울음소리도 미끄러지는 터널을 지나

      허공에 걸려 홀로 떨며 서 있던 그림자

 

      터널에서 무심히 달려나오는 생명을 받아 안아

      검은 이빨로 아작내는 허공의 검은 아가리

 

      응달에서 오래 떨며 너를 기다렸어, 내 얼어붙은 팔다리를 꺾어서라도 너를 안으면 너의 목을 조르면, 너의 뜨거운 피로 얼어붙은 나를 녹여줄 수 있겠니?

 

      급커브를 돌자마자 마주치는 얼굴

      먼지와 눈물이 함께 엉겨 붙은 검은 색

      살짝 젖어 있던 얼굴이 돌연

      꽃모가지에 얼음송곳니를 꽂는다

 

      누가 걷어 찬 화분일까

      산산이 부서져 중심이 잡힐 때까지

      제 칼날로 저를 멈추기까지

      제동거리가 예상외로 길었다

  

      맘껏 타오르지 못한 불은

      재 대신 얼음을 남긴다

      모든 얼음은 한때 불이었다

                       - 「블랙 아이스」 전문

 

 

   대칭을 통한 공존, 그리고 상식적인 믿음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식은 이 시에서도 반복된다. 블랙 아이스(Black ice)는 겨울철에 아스팔트 도로 표면에 내린 눈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얇은 얼음막으로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매년 겨울, 교량이나 터널의 출입구 등에 생긴 블랙 아이스로 인해 교통사고가 발생했다는 뉴스에 등장하는 바로 그것이다. “터널을 지나면 교각이 있고, 교각을 지나면 또 터널이 있다”, “급커브를 돌자마다 마주치는 얼굴”, “제동거리가 예상외로 길었다”라는 진술처럼 시인은 블랙 아이스로 인한 겨울철 교통사고를 염두에 두고 진술을 이어나간다. “생명을 받아 안아/검은 이빨로 아작내는 허공의 검은 아가리”라는 표현처럼 시인에게 블랙 아이스는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시인이 이 자연현상에서 주목하는 것은 교통사고의 무서움이나 죽음 같은 것이 아니다. 시인이 강조하려는 바는 “한번 녹았던 마음이 다시 얼어붙으면 흉기가 된다”라는 진술처럼 블랙 아이스, 즉 얼음이 ‘녹기’와 ‘얼기’라는 모순적인 현상의 결합체라는 사실이다. 앞에서 우리는 「모래 전야, 야전」이 삶과 죽음, 안과 바깥이라는 이질적인 극단을 대칭적 관계를 통해 통합하고, 그럼으로써 두 극점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인식의 모험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 시에서 이질적인 극단의 대칭적 관계는 “한번 녹았던 마음이 다시 얼어 붙”는 것, 즉 도로 위에 차갑게 얼어붙은 블랙 아이스 내부에 “맘껏 타오르지 못한 불”이 존재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변주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모든 얼음은 한때 불이었다”라는 진술로 정식화되며, 그것은 ‘얼음’이 오로지 차갑기만 한 것이 아님을, 한때 뜨거움이 깃들어 있었던 것만이 얼음이 된다는 새로운 감각으로 연결된다.

 

   상식의 경계를 돌파하는 이러한 대칭의 감각은 「감염」에서 ‘일상’과 ‘비일상’의 관계로 변주된다. 이 시는 코로나 팬데믹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자주 들었던 말 가운데 하나는 팬데믹 사태가 종식되어도 결코 이전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즉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개념이었다. 시인은 이 사건의 불가역적 성격, 즉 ‘이전’과 ‘이후’ 간의 단절을 ‘사랑’이라는 사건에 전유한다.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 실존적인 사건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만남 ‘이전’과 ‘이후’의 세계 감각을 확연하게 구분 짓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강렬함은 우리에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인다는 점에서 불가역적인 ‘이후’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너를 읽고 난 후/밤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다시는 강 건너로 돌아가지 못한다”라는 진술처럼 이 시에서 시인이 제시하는 ‘사랑’이 인간의 관계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염, 중독, 매혹 등은 주체의 자율성을 제약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이 시를 ‘이전’과 ‘이후’ 간의 불가역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어야 할까? 7연에 등장하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일상 속에서”라는 표현에 주목하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가능할 듯하다. 알다시피 코로나 팬데믹은 ‘일상’의 박탈이라는 사건으로 도래하여 ‘일상’과 ‘비일상’, 즉 예외 상태의 차이를 지워버렸다. 시민들이 일상적인 활동을 중단한 지난 2년은 예외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예외 상태 속에서도 출근/등교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등의 일상은 유지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일상은 예외 상태에서 행해지는 일상이라는 점에서 일상이면서 동시에 비(非)일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일상”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 상태를 의미한다. 왜 그것이 비(非)일상일까? 그것은 “누군가 다가오면 멀리 돌아서 가는 길”이라는 표현처럼 타인과의 접촉을 경계하는 태도를 통해 확인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상과 비(非)일상의 경계는 불투명해지고, 두 극단은 대칭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로 통합된다.

 

 

   2.

 

   정채원의 시집에는 ‘죽음’의 기호들이 흩뿌려져 있다. “까마귀가 파먹은 거북의 눈구멍”(「모래 전야, 야전」)과 생명을 “검은 이빨로 아작내는 허공의 검은 아가리”(「블랙 아이스」)를 시작으로 악취를 내며 “썩은 배추 껍데기”(「졸다 깨는 시장」), “죽은 짝을 여전히 안고 다니는/무당개구리”(「울음주머니」), 탈옥에 성공한 후 자살한 “사형수”(「탈옥」), “도살장”(「표정을 삼키다」) 같은 죽음(유한성)의 기호들이 시집 전체에 걸쳐 등장한다. 이 작품들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불멸의 피클은 존재하지 않”(「간을 보다」)는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우리가 “누구든 떠나야 하는 이 별”(「하루에 두 번 씩은 춤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감각하게 된다.

 

   유한성, 즉 인간이 죽을 운명을 지닌 존재라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삶에서 ‘죽음’의 의미가 생물학적인 죽음, 그러니까 무(無)가 되는 사건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한 철학자는 “죽은 자는 죽음을 다시 산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삶이 끝난 지점에서 죽음이 시작된다는 것, 그리하여 죽음이 종결이 아님을 뜻한다. 죽음이 모든 것의 종결이 아니라는 것은 ‘죽음’이 완결될 수 없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무한히 죽음에 다가갈 수 있을 뿐 끝(the end)으로서의 죽음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채원의 시에서 ‘죽음’이 이러하다는 말이 아니다. 정채원의 시에서 죽음은 생물학적인 의미의 ‘끝’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채원의 시에서 ‘죽음’은 어떤 것일까?

 

 

   우리 집 신발장 옆에 놓인 꽃은 일 년 전에도 피어 있었고 어제도 피어 있었고 오늘도 피어 있다. 언제나 활짝 피어 있는 꽃은 꽃이 아니다. 질 줄도 모르는 건 꽃이 아니다.

 

   나는 피었다가 기필코 지는 꽃을 사랑한다. 지는 모습을 감추지 못해 슬퍼하는 꽃을 오래 사랑한다. 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꽃을 더 오래 사랑한다. 피기도 전에 져버린 꽃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패색이 완연한 계절, 내 안에 너는 아직도 피어 있다. 비로소 꽃이 되었다. 서로에게.

 

                                     - 「비로소 꽃」 부분

 

 

   두 종류의 ‘꽃’이 있다. 하나는 언제 어떻게 보아도 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꽃이고, 다른 하나는 늘 지고 있는 상태의 꽃이다. 전자가 “언제나 활짝 피어 있는 꽃”이라면 후자는 “꽃을 버리면서 꽃”이 되고 있는 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자는 항상성의 꽃이고, 후자는 유한성의 꽃이다. 항상 지고 있다는 것은 탄생 이후부터 줄곧 소멸/죽음을 향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생명의 유한성을 가리킨다. 시인은 두 가지 ‘꽃’을 대비하면서 “피었다가 기필코 지는 꽃을 사랑한다”라고 고백한다. 심지어 그는 “질 줄도 모르는 건 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시인은 꽃이 지는 것을 ‘버리는 것’이라고 바꿔서 표현하고, 그것이 마치 꽃의 능력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렇게 보면 “일 년 전에도 피어 있었고 어제도 피어 있었고 오늘도 피어 있”는 항상적 상태의 꽃은 무능력한 존재이다. 왜 그것은 ‘(무)능력’인가? 시인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피었다가 지는 꽃이, 피기도 전에 져버린 꽃이 오래도록 자신의 기억 속에 남는다고 고백한다. “내 안에 너는 아직도 피어 있다. 비로소 꽃이 되었다.”라는 진술처럼 꽃은 시들고 난 이후, 즉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다. 어디에? ‘내 안’, 그러니까 시인의 기억에 살아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현상을 가리켜 “비로소 꽃이 되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이 대상(‘꽃’)과 비(非)도구적인 방식으로 관계 맺을 때 사물의 존재감이 온전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기억 속에서 죽음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죽음 이후에도 기억은 잔존한다는 것, 그리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연속된다는 감각은 정채원의 시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다. 가령 석 달 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오아시스를 가리켜 “얼핏 본 주황물고기는 사람들 머릿속에서 계속 헤엄쳐 다니겠지, 다음 우기를 기다리면서.”(「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기억’이 죽음(유한성) 이후의 시간을 살게 만든다는 감각이 투영되어 있다. 또한 “화석이 된 기억의 조각들”을 곱씹으면 “내 입술엔 여전히 피가 묻어난다”(「표정을 삼키다」)라는 진술 역시 현존하지 않는 대상이 현실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물질’과 ‘형이상학’의 관계로 변주하면 “물질과 비물질이 서로 밀고 당기고 엎치락뒤치락/꼬리에 꼬리를”(「물질은 비물질을 껴안고 운다」) 문다는 인식이 가능해진다. 여기에서 ‘물질’은 “두개골 속 1.5 킬로 고깃덩어리”이고, ‘비물질’은 “나는 누구인가/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같은 실존적․형이상학적 물음이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범주에 속하지만 한 인간의 실존 안에서 통합되어 존재한다.

 

 

      이빨 하나도 빠지지 않은 두개골이

      눈구멍 속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그가 끼었던 반지와 팔찌와 목걸이들

      함께 싸늘히 진열된 채

      나를 파고 또 판다

  

      썩지 않는 구멍들

      그 고리 속으로 나를 휘돌린다

      나를 가둔다

 

      죽어서도 출토되지 않는 집착이 있어

      살 뜨거운 것들을 씹어 삼키려는가

 

      이빨 하나도 잃지 않은 너는

      어쩌다가 살부터 다 빼앗기게 되었나

 

      영영 흙이 되지 못하는

      흙투성이 황금반지와 팔찌만 거느린 채

      제 안에 묘혈을 파고 또 파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팽팽하게 마주 보고 있다

      결코 한 발짝도

      건너편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듯이

 

      서로에게 한없이 끌려가는 듯이

                        - 「썩어도 건치」 전문

 

 

   정채원의 시는 이항적 관계의 반복이다.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대칭’의 이미지라고 명명했다. 정채원의 시는 상식적인 층위에서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하나이면서 둘(혹은 여럿)’의 감각적 세계를 생산한다. 이것은 철학자 들뢰즈가 이접적 종합이라고 명명한 것과 유사하다. 이접적(離接的) 종합이란 상이한 의미가 병존하는 방식의 결합으로서 둘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함축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논리가 아니라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이라는 논리가 바로 이접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물질은 비물질을 껴안고 운다」를 다시 읽어보면, 여기에서 인간 존재가 ‘뇌=물질’과 ‘실존적․형이상학적 물음=비물질’의 결합체로 인식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물질은 비물질을 껴안고 운다’라는 제목처럼 그것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도 아니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함하는 관계도 아니다. 이러한 이접적 성격은 유한과 불멸, 삶과 죽음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시인은 복수의 시편들에서 생명의 유한성과 기억의 영속성을 상반되는 세계처럼 제시한다. 죽음과 유한성의 기호들을 제시하면서 “기억은 썩지 않아”(「불멸의 온도와 습도」)라고 말할 때는 특히 그렇다. 물질과 비물질의 공존, 썩는 신체와 썩지 않는 기억의 결합, 이것이 바로 정채원의 시에서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는 술어들이다. 다만 시인은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푸르게 죽어 있으면서/푸르게 살아 있지”(「불멸의 온도와 습도」)나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과/어디선가 막 도착한 사람들”(「하루에 두 번 씩은 춤을」)처럼 상반되는 의미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야말로 정채원의 시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썩어도 건치」 또한 두 세계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번에는 ‘삶’과 ‘죽음’이 그것들이다. “반지와 팔찌와 목걸이”, ‘진열’, ‘출토’ 등의 시어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시인은 지금 박물관에 있는 듯하다. 시인의 눈앞에 “이빨 하나도 빠지지 않은 두개골”과 “그가 끼었던 반지와 팔찌와 목걸이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시인은 “이빨 하나도 잃지 않은 너는/어쩌다가 살부터 다 빼앗기게 되었나”라고 묻는다. 한쪽에는 죽은 자의 두개골과 부장품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것을 지켜보는 산 자인 ‘나’가 있다. 시인에게 이 장면은 “산 자와 죽은 자가 팽팽하게 마주 보고 있”는 것으로 각인된다. ‘삶’과 ‘죽음’이 마주 보고 있는 이 형상에서 대칭적 관계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대칭이 아니라 팽팽한 대칭, 즉 양쪽 모두가 “결코 한 발짝도/건너편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대칭이다. 여기에서도 ‘삶’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세계는 대칭적 관계 안에서 ‘하나이면서 둘’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논리적인 층위에서 ‘삶’과 ‘죽음’은 상반된다. ‘삶’은 죽음이 아닌 상태이고, ‘죽음’은 더 이상 삶이 아닌 상태인 것이다. 그것들은 서로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따름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대칭에서 “서로에게 한없이 끌려가는 듯이”라는 진술처럼 강력한 인력을 발견한다. 정채원의 시에서 그것들의 경계는 불가역적이지 않다.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는 점차 모호해진다.

 

 

      자발적으로 두 개의 원소로 분해될 수 없는

      물처럼 두 사람은 흐른다

 

      무표정한 격막을 사이에 두고

      둘은 서로를 밀어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자석의 같은 극이었을까

      너무 닮아 서로를 모욕하는 사이처럼

 

      외면한 채 마주보는 심장은

      서로에게 둥그런 피를 돌리지 못하고

 

      남들에겐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을

      자신도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어이 보고야 마는 눈

      오후의 뇌 속에는 어떤 뾰족한 물질이 흘러나오는 것인지

 

      성공한 듯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화학 실험처럼

 

      끝내 수소와 산소로 돌아가지 못하는 물속에서

      한동안 전류가 저릿하게 흘러갔을 뿐

 

      숙성도 되기 전에 변질된 와인을 맛보며

      이 맛이 아닐 텐데

      이 향이 아닐 텐데

      코르크 마개 탓부터 하는 사람들

 

      화합하지 못한 이유와 결별하지 못한 이유는

      어떤 화학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번번이 같은 매듭에서 낯익은 벨이 울리고

      실패해야 하는 이유, 실패해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함께 숨 쉬는 물속에서 명징한 기포가 발생하지 않고

      멜로디처럼 탄식처럼 전류가 헛되이 흐르다 멈추는 이유

 

      부서진 계단을 지나

      유리조각 박힌 꽃담을 지나

      물은 오늘도 흘러간다

                             - 「케미스트리」 전문

 

 

   케미스트리(Chemistry)는 원래 화학(반응)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것을 ‘케미’라고 줄여서 쓰고, 그 의미도 사람들 사이의 조화나 주고받는 호흡을 이르는 것으로 전용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케미스트리’는 ‘두 사람’, 즉 이항적 관계를 가리킨다. 정체원의 시는 이항적 관계 자체가 핵심적인 모티프이므로 두 항이 인간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시적 변주라는 차원에서 이 시에서는 사람이 두 항으로 설정된다. 여기에서 이항적 관계는 ‘두 사람’에서 시작되어 격막을 사이에 두고 있는 ‘둘’, ‘외면한 채 마주보는 심장’ 등으로 연속적으로 변주된다.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두 개의 원소로 분해될 수 없는/물”처럼 혼합체로 존재한다. ‘물’은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하나’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하나’에서 ‘둘’을 인식한다. 문제는 ‘하나’ 안에 “서로를 밀어내야만 존재할 수 있는/자석의 같은 극” 같은 ‘둘’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공존은 하나이면서 통상적인 ‘하나’와 다르다는 점에서 이상한 공존이다. 시인은 그것을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화학 실험”에서 “한동안 전류가 저릿하게” 흐른 정도라고 표현한다. 제대로 숙성되기 전에 ‘변질’된 와인의 맛이 그러할 것이다. 이 이상한 공존에는 “화합하지 못한 이유와 결별하지 못한 이유”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고차방정식이 필요하다. 화합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고, 결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둘이 아니라는 뜻이니 이들 ‘두 사람’의 관계는 정확히 ‘하나이면서 둘’, 그 이상의 표현을 찾기가 어렵다. 이 이상한 존재론적 ‘화학식’에서 ‘하나’를 강조하느냐 ‘둘’을 강조하느냐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과 맺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관계가 ‘화합’과 ‘결별’ 그 사이에서 행해진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시는 화학반응을 인간관계에 전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화학(반응)’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3.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항적 관계는 인간의 현존 그 자체이다. 인간은 조화로운 유기체가 아니라 무의식처럼 ‘나’ 아닌 것들, ‘과거-기억’이나 수시로 떠오르는 상념처럼 존재의 항상성을 위협하는 이질적인 것들을 포함한 다양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물질’과 ‘비물질’의 관계처럼 대칭적 관계로 말해질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든 개체가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동한다는 특성에 비롯되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한 자리에 못 박힌 꽝꽝나무도/잎새 계속 뒤척이는 것이다/울렁거리는 것이다”(「얼음도 1초에 수백 번 춤춘다」) 같은 구절이 대표적이다. 사물의 경우만이 아니다. 인간 또한 동일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혹은 관계의 성격에 따라 새로운 가면(persona)을 바꿔 쓰는 유동적인 존재이다.

 

   한편 시인에게 시작(詩作)은 일종의 수동적 행위로 이해된다. “내가 찾는 자루도 내가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어디선가 나를 자꾸 부를 것이다 밤마다 말똥만 한 자루 남겨놓고 떠날지라도 쉬지 않고 내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나는 이따금 그 말을 받아적는 것으로 타는 갈증을 달래며 산다”(「자루는 없다」)라는 진술처럼 시인에게 글쓰기는 타자의 ‘말’을 받아적는 행위이다. 시인은, 존재한다는 것은 타자(‘다른 별’)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고, 쓴다는 것은 “그의 한숨과 눈썹표정을 받아쓰기”(「홀로 아닌 홀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에게 우주가 원자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세계였다면, 시인에게 우주는 모든 것들이 다른 존재의 주위를 도는 거대한 공전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정채원의 시에서 타자적 존재는 ‘나’의 바깥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를 하나의 복합적 존재, 그러니까 내부에 타자적 존재가 이미-항상 공존하고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따라서 타자의 ‘말’을 받아 적는 행위를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이전 시집들에서 이러한 문제는 ‘얼굴’의 이미지로 구체화되었다. 가령 시인이 “실루엣만 남은 얼굴들/구겨진 마스크처럼 쓰다 버린 내 얼굴들/셀 수 없는 얼굴들이 출몰하는 변검의 밤”(「짝눈 2」)이라고 말할 때 ‘얼굴’과 ‘마스크’는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다른 얼굴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페르소나(persona)들이 항상 ‘밤’에 출몰한다는 사실이다. 낮이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라면, 밤은 감성 혹은 무의식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낮이 노동의 세계라면, 밤은 유희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오디세이아』의 한 구절처럼 밤은 낮 동안 짠 수의를 다시 푸는 이완의 시간이다. 글쓰기에 대한 모티프를 함축하고 있는 「얼음도 1초에 수백 번 춤춘다」에서 시인이 “자정이 넘어서야 너는 나타날지 몰라”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네 찢어진 상처에 덧대고 꿰매는 밤”(「넝마주이 사랑법」)이라는 진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밤’은 낮 동안 만들어진 상처를 꿰매는 치유의 시간으로 제시된다. 다음의 구절은 글쓰기에 대한 흥미로운 진술을 함축하고 있다.

 

 

      내가 잠들면 너는 깨어나

      오래된 서랍을 열고 꽃을 피운다

      네가 쓰러져 있는 동안

      나는 잠시 맑은 정신으로 창문을 닦고

      책상 앞에 앉는다

                           - 「넝마주이 사랑법」 부분

 

 

   이 시에서 ‘나=넝마주이’는 시간을 줍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때의 시간이란 기억, 상처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나’와 ‘너’의 관계이다. 시인의 진술에 따르면 ‘나’와 ‘너’는 정반대로 움직인다. ‘나’가 잠들면 ‘너’가 깨어나고, ‘너’가 쓰러져 있으면 ‘나’는 맑은 정신으로 창문을 닦는다. 편의상 이 시에서의 ‘너’를 ‘나’의 안에 존재하는 타자성, 또는 무의식이라고 읽을 수 있다. 일찍이 모리스 블랑쇼는 주체의 죽음, 즉 우리가 침묵하는 동안에만 타자가 말할 수 있다고 썼다.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도 ‘나’는 ‘너’가, ‘너’는 ‘나’가 활동하지 않을 때에만 활동한다. 여기에서 시간의 넝마를 주워다 상처를 꿰매는 행위가 시작(詩作)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성-노동-의식’의 행위가 아니라 ‘감성-유희-무의식’의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쓰기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는 것, ‘나’는 “내 우심방 안에 잠깐 머물다가/어디론가 흘러가버리는 너를”, “맥박보다 더 여리고 숨이 짧은 너를/어떻게 하면 냉동보관 할 수 있을까”(「얼음도 1초에 수백 번 춤춘다」)를 고민하는 주체일 뿐이다.

 

 

      직립보행을 시작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중 발굽이 있는 돌연변이들이 살아남아 후손을 이은 게 시인이 되었다. 단숨에 수 천 년 전 풀밭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떠나간 애인의 가장 깊숙한 우물까지 숨어 들어가 보기도 하지만

 

      발굽을 숨긴 채

      끝 모를 만장굴을 키우는 자들

 

      동굴 밖으로 나가려고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며 손톱으로 긁은 벽화가 더러 발견되기도 한다. 불긋한 핏자국 같기도 한 그것.

 

      제 안에 키우는 동굴 속, 이따금 빗물이 스며드는 날이면 어디론가 끝없이 달려가는 발굽소리 들린다. 뜻 모를 신음소리만 내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괴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詩)라는 신(神)을 만들어 냈다고도 하는

 

      꿈보다 수상한 해몽이 있다.

                                      - 「진화론 P」 전문

 

 

   시집의 마지막에 배치된 「진화론 P」는 고고학적 형식으로 발화된 ‘시인-존재론’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시인은 “발굽을 숨긴 채” 자신의 내부에 “끝 모를 만장굴을 키우는” 돌연변이들이다. 그들은 제 안에 각자의 동굴을 갖고 있으며, 동굴 벽면에 비친 형상을 통해서만 세상을 인식한다. 이성의 진리를 숭배하는 자들은 세상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시인들이 알고 있는 동굴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동굴이 없다면, 그리하여 ‘낮’의 세계에 내던져진다면 그들은 더 이상 시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시인들은 특정한 시간, 조건, 상황과 마주하면 “뜻 모를 신음소리만 내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괴물”이 내는 발굽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이것은 타자의 목소리이다. 시인은 시(詩)가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괴물’의 소리를 받아적은 것인지도 모른다. 모리스 블랑쇼에게 문학의 발생은 후자와 연결된다. 시인 또한 어딘가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가리켜 “나는 이따금 그 말을 받아적는 것으로 타는 갈증을 달래며 산다”(「자루는 없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분명한 것은 시(詩)가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괴물’과의 관계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내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타자)’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