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제5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만능 접착테이프」를 읽다/권영숙

Beyond 정채원 2022. 8. 1. 23:16

 

 

정채원 시인의 신작 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란 시집을 읽었다. 이 시인은 도대체 언어에 관해서는 세월과 타협이 없다.
느긋하게 인생에 대해서 한 자락 깔 법도 한 연배이신데, 언어적 실험을 치열하게 시도하며 피흘리며 시를 쓰신다. 내용은 인생의 철리를 다루는 곡진하고 깊은 시인데 언어는 파릇하게  젊다. 그래서 시읽는 재미가 있다.

시 한 편을 올린다. 다사다난한 인생의 간난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줄 만능 접착테이프를 발견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능 접착테이프」정채원 시인

  바람벽에 선반을 붙이고, 그 위에 쌀 10킬로를 올리고, 그 위에 시름 10 킬로를 더 올려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건 강력 테이프 덕분이다. 마음속 비탈에 코끼리를 붙이고, 하마를 붙이고, 도깨비를 붙여도, 쉽사리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는 건 강력 테이프 때문이다. 걸핏하면 병상에서 굴러 떨어지는 아버지, 그제도 굴러 떨어져 골반에 금이 간 구순의 아버지가, 어제는 밤새 숙면을 취한 것도, 알고 보면 다 강력 테이프 덕분이다. 요즘은 꿈마다 부처인지 예수인지의 손을 잡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산으로 들로 구경을 다녀온다는 아버지, 아버지가 아직도 이승이라는 병상에 머무는 건 그들이 보내준 강력 테이프 때문이다. 아버지보다 두 살 많은 어머니, 5년 전에 병상을 떠난 어머니가 아직도 아버지의 병상 곁을 떠나지 못하는 건, 아버지에게서 빌려 쓰고 갚지 못한 강력 테이프 때문이다. 회사를 8번 퇴직하고 주량이 점점 늘어가던 삼촌이 50을 넘기지 못하고 병상을 떠난 건 테이프가 모자란 때문이다. 홈쇼핑에서 파는 테이프가 아니라 하늘에서 직접 보내주는 테이프가 모자라면 즉시 기도로 주문해야 한다. 무료로 총알배송, 새벽배송이 안 되면 유료배송이라도 주문해야 하는데, 삼촌은 그 배송비를 아끼려다 어느 새벽 심장이 멈추어 병상을 아주 떠나버렸다. 생전에 그토록 원하던 전망 좋은 창가의 병상으로 꿈꾸듯 떠나버렸다. 유품 정리를 하던 나는 그의 창고에서 포장도 뜯지 않은 강력 테이프를 몇 상자 발견했다. 창고에 넣어둔 걸 깜빡했던 것인지,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만능이라 믿지 않았던 것인지 이젠 확인할 길이 없다.

* 볼일보러 갔다가 비를 피하느라 들른 망원동 카페에서 잠시 시집을 읽다. 사진의 앤디 워홀의 '먼로'는 시카고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미술관 특별 에디션 중 하나.

 

 

Naver Blog <라이크로프트의 書巢>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