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산책자
김연아
잠 못 드는 밤이면 당신은 텅 빈 도시를 걸었지
꿈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안개 낀 해변을 걷는 느낌으로
누군가 손을 잡는다고 상상하면서
거대한 구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이
당신은 내 꿈의 재료로 만들어졌고
성스러운 정액을 내 시에 뿌렸지
시간의 척추를 통해 강렬하게 사랑이 치솟을 때
자신의 고독으로 구원받은 자
당신은 밤의 왕
나는 생각하지 않고
말을 쓰지 않기 위해
산책하는 달이 되었지
이것이 우리가 대화하는 방식
우리는 불꽃 위에 떨어지는 두 눈송이
내 입속의 우주를 당신의 입속으로
옮겨놓은 첫 키스
나는 본다, 내 꿈속에서 당신이 꿈꾸는 걸
인동꽃 위에 떠 있는 벌새처럼
당신은 떨면서 말했지
네 목소리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네 이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죽은 피부를 걷어내고 새 피부가 빛날 때까지
당신과 내가 서로를 관통할 때
거기 우리 영혼의 자리가 있다
평생 동안 눈멀었다가
처음으로 눈을 뜬 사람처럼
나는 침묵 속에서 확장되는 중이다
진동하는 어둠 속으로 당신은 걸어가겠지
소리 없는 종소리를 들으며
텅 비어 차가운 밤을 수태시키며
격월간 《현대시학》 2022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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