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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시집해설/권혁웅

Beyond 정채원 2014. 7. 11. 18:41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시집해설

 

 

 

재투성이 오이디푸스
―정채원,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권혁웅

 


버림 받은 어린 오이디푸스와 부엌데기 신데렐라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발’로 자신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오이디푸스는 ‘발이 부은 자’란 뜻이다. 자식의 손에 죽임을 당한 운명이라는 신탁을 받자, 아버지는 갓 낳은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인은 차마 아기를 죽이지 못하고 산에다 버린다. 발목이 뚫려 가죽끈으로 묶였기에 ‘부은 발’이라는 뜻의 별명이 그의 이름이 되었다. 그를 근친상간과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절뚝이며 걷는 자는 온전한 발과 불구의 발을 교대로 디딘다. 다르게 말해서 그는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 동시에 발을 디딘 자다. 그가 인륜을 어긴 것은, 처음부터 다른 질서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탁이 밝혀지자 그는 제 눈을 찔러 장님이 되었다. 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자는 다른 세상의 빛을 본다. 그래서 예언자는 대개 장님이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 소녀’란 뜻이다. 부엌에서 늘 재를 뒤집어쓴 소녀다. 바로 그 재가 신령한 소통의 매질(媒質)이다. 불을 거친 후의 세계는 정화된 세계다. 그래서 화롯불을 지키는 우리네 조왕신이나 로마의 베스타 여신은 가정과 국가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신데렐라는 바로 이 불의 주인이다. 그녀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샤먼으로 자정이 되면 재투성이 소녀로 돌아온다. 자정은 정오와 대립되는, 무의식의 시간이자 생성의 시간이다. 그녀에게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외부의 구원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치 않았다. 그녀를 신분상승이라는 욕망의 인격화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녀의 발은 저 발이 부은 자(오이디푸스)의 맞짝이다.


오이디푸스가 공간적이라면 신데렐라는 시간적이다. 전자는 공간(세계)의 분할을, 후자는 시간(자정은 날짜 분할선이다)의 분할을 대표한다. 이들은 경계의 인물들이었으며, 그 경계를 제 안에 삼킴으로써(제 본질로 삼음으로써) 양쪽의 세계를 포괄하는 인물이 되었다. 오이디푸스는 그 불구성 덕분에 정상인 세계와 신령한 세계에 동시에 발을 디뎠다. 신데렐라는 재를 뒤집어쓴 덕분에 정상인 세계(낮)와 신령한 세계(밤)를 동시에 품었다. 정채원 시의 퍼스나는 바로 이 경계의 인물들과 닮았다. 그녀를 부은 발로 걷는 여성 오이디푸스, 곧 재투성이 오이디푸스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자서가 벌써 그런 경계에 대한 얘기다. “지하철 선로 건너편의 얼굴들을/남의 얼굴 보듯 바라본다./어느 쪽이/먼저/지금, 여기를/떠날 것인가,/마치 목적지가 따로 있다는 듯.”(「자서」) 선로를 사이에 두고 경계가 그어졌다. 두 번의 비교가 있는데 얼핏 보면 이상한 비교다. “선로 건너편의 얼굴들”은 처음부터 “남의 얼굴”이며, 그들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따로” 있었다. ‘다른 것’을 ‘마치 다른 것인 듯’이라고 말할 때, 강조점은 동어반복인 ‘다른 것’에 있지 않고 ‘마치 ~인 듯’이라는 비교의 형식 자체에 있다. 저 건너편의 얼굴은 타인의 얼굴이며, 우리는 다른 목적지를 찾아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얼굴을 타인의 얼굴인 양, 그 얼굴들이 각자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인 양 대한다. 그러니까 이 이상한 비교구문은, 우리가 서로의 거울이며 우리가 가는 곳은 궁극적으로 같은 곳이라는 전언을 강조한 표현이다. 경계의 이쪽과 저쪽이 거울처럼 마주하고 있었던 셈이다. 문제는 “어느 쪽이/먼저” 떠나는가일 뿐이다. 어디로? 시집의 표제시이자 서시가 이 질문에 답한다.

 

 

어머니, 저는 오늘도 돌아요
압력밥솥의 추처럼
얼음판 위를 헐떡이는 팽이처럼
터질 듯한 마음의 골목골목
팽글팽글 돌아요, 돌아야 쓰러지지 않아요
당신의 경전을 맴돌면서
저는 의심하고 또 의심해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때까지
서쪽으로 서쪽으로 계속 가면, 어머니
신대륙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얕은 곳 너머 갑자기 희망이 깊어지는 곳
그러나 희망봉 근처엔 죽음의 이빨
백상어가 헤엄쳐 다닌다지요
가장 안전한 곳은 가장 위험한 곳
상식의 말뚝에 한쪽 발을 묶고
나머지 한 발로 절뚝절뚝
기상부터 취침까지
일상의 풀밭을 뱅글뱅글 돌아요
소등 뒤에도 전갈자리 사수자리 돌고 돌다
아주 돌아버려요
아니, 저는 더 이상 돌지 않아요
그래도,
그래도 지구는 돌지요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전문

 

 

이 출항기의 의의를 저 수많은 술어들의 회전(“돌아요”)에 주목해서 간추려보자. 첫째, 여성 오이디푸스의 모습이 두드러진다는 것. “상식의 말뚝에 한쪽 발을 묶고/나머지 한 발로 절뚝절뚝/기상부터 취침까지/일상의 풀밭을 뱅글뱅글 돌아요.” 다른 보폭과 보법을 가진 두 발은 필연적으로 불구다. 이 불구의 걸음이 두 세계를 동시에 답사하게 만든다. 그런데 두 발이 “상식”에 매였거나 “일상”을 맴돌 뿐이라면 오이디푸스적 여정이 아니지 않을까? 아니, 여정이 맞다. “소등 뒤에도” 나는 “전갈자리 사수자리”를 돌고 돌기 때문이다. 내 오이디푸스적 걸음은 낮/밤, 지상/천상, 일상/초월을 두루 관통한다. 둘째, 이 회전은 실존 그 자체라는 것. 나는 “압력밥솥의 추처럼/얼음판 위를 헐떡이는 팽이처럼” 돈다. 압력밥솥의 추는 끓어오르는 정점을 지시하고, 팽이는 회전으로서만 바로 선다. 둘에게 회전은 외양이 아니라 본질이다. 회전을 통해서, 나는 어떤 정점에 있으며, 그 정점이 내 자신의 본질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전은 의심하는 작용이라는 것. “당신의 경전을 맴돌면서/저는 의심하고 또 의심해요.” 정확히 말하면 이 의심은 확신의 반대가 아니라 확신의 정체다. 의심을 극한까지 추구하면 “신대륙”에 이를 것인데, 그곳의 희망은 “죽음의 이빨”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희망을 품는 것은 위험하지만 위험 없이 도달할 수 있는 신대륙이란 없다. 의심이 “가장 안전한 곳은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깨달음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므로 나는 확신을 의심함으로써 의심을 확신한다. 세계는 오이디푸스의 발걸음 앞에서 둘로 쪼개져 있다. 두 세계를 다 디디기 위해서 필요한 발걸음은 반신반의다. 넷째, 회전을 통해서 극한이 중용과 만난다는 것. 한 발은 묶여 있고 다른 한 발만이 걸음을 디디므로, 나의 행적은 원을 그린다. “나는 [……] 돌고 돌다/아주 돌아버려요.” 나는 일상의 영역만을 맴돌았을 뿐인데, 사실은 그로써 광기의 영역까지 가버렸다. 다르게 말해서 제자리를 맴돌았을 뿐이지만, 그로써 그 원환의 자리를 넘어서 버렸다. 마지막으로, 회전은 나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본질이기도 하다는 것. “그래도 지구는 돌지요.” 갈릴레이의 저 유명한 일화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한 상태에서도 발언이 취소하지 못하는 진실을 역으로 폭로한다. 내 불구의 걸음이 두 세계의 진실을 밝힌다면, 역으로 말해서 세계의 분열이 내 걸음을 뒤틀게 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세계는 처음부터 오이디푸스적이었다.

 
걷는 발과 묶인 발이란 형상은 이런 오이디푸스적 보법(步法)의 극한적 표현이다. 이것은 정주와 일탈, 현실과 초현실, 삶과 죽음, 소문과 진실 등을 두루 아우른다. 하나는 고정점을, 하나는 원을 그리면서. 이 형상은 부동(不動)이자 회전이며, 부피도 면적도 없는 일점이자 가장 넓은 면적을 그려내는 원주(圓周)이며, (자서에 따르면) ‘지금 여기’이자 궁극적인 ‘목적지’이다. 정채원의 시는 이 두 점(부동의 일점과 원주 위의 점)을 왕복한다.

이 왕복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언어 차원에서 이 왕복은 소리의 왕복이다.

 

 

마다가스카르의 개코원숭이 같은 이름을 가진 그 아이는 학교를 싫어하는 아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방은 어떤 곳일까 아이아이 학교 가기 싫어 아이아이 싫어싫어 징징대는 새끼 원숭이에게 엄마 원숭이는 코코 달랬을까 개코개코 야단쳤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개가 아이아이 짖어댔다지 아이아이 나는 그것도 모르고 개는 멍멍 혹은 바우와우 짖는 것이라고 와와거렸지 밤새 술 마시고 개판을 치면 개 같은 인생 살게 된다고 아이아이 속상해 어째 아이들은 엄마 맘을 몰라주니 아이아이 다 저희들 잘 되라고 하는 말인데 아이아이 너 나중에 뭐가 될래 아이아이 알록달록 털옷 입은 개코원숭이처럼 이 비디오방에 번쩍 저 당구장에 번쩍 아이아이 그러다 프리랜서 사진작가 된 아이도 있다구 잘 나가는 패션디자이너 된 아이도 있다구 아이아이 고대 그리스인들은 개가 아이아이 짖는다 했다지 그럼 여태 내가 몇 번이나 바우바우 한 거야 도대체 어쩌려고 하우하우 한 거야 아이아이, 멍멍


―「멍멍, 아이아이」 전문

 

 

제목을 이룬 두 소리 가운데 “멍멍”은 고정점이고 “아이아이”는 이동점이다. “아이아이”가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들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란 뜻으로, 그 다음에는 감탄사로 쓰였다가, 마침내는 개 짖는 소리로 변형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개가 아이아이 짖어댔다지.” 원주 위의 점이 고정점이 되자, 이번에는 고정점이 원환운동을 시작한다. “멍멍”은 그 뜻을 그대로 둔 채, “아이아이, 바우와우, 바우바우, 하우하우” 등으로 변환된다. 하나가 동음이의어적 변환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음동의어적 변환이다. 다시 이 변환이 아이와 엄마의 관계에 투영된다. 아이가 낸 소리가 “아이아이”라면, 엄마가 낸 소리는 “코코”다. 코코 역시 달래는 소리(“코코 달래다”)에서 신체의 일부(“코”)로, 다시 욕설(“개코”)로 변환된다. “다다”를 ‘Dada’와 ‘전부 다’와 말더듬는 소리(“~있었던 것이다, 다다”)로 변환한 「다다각시」, “바람”을 ‘공기의 이동’과 ‘춘심의 발동’으로 겹쳐 불게 한 「바람궁전의 기억」, “휴관”을 “휴, 관”(감탄사+명사)으로 쪼갠 「오늘은 휴관이에요」 등이 다 그렇다.
의미 차원에서 이 왕복은 이항대립 사이의 왕복이다. 이를 비유적으로 삶과 죽음의 왕복이라 부르자.

 

 

서둘러 올라탄 엘리베이터 번호판의 빨간 불 움직이지 않는다 계속 한 곳에 머물러 있다 선뜩한 바람 한 줄기 목덜미를 스친다 아, 나도 드디어 갇히게 되었구나 내 그토록 떠나고 싶던 이 아파트, 이 저자거리, 이 세상에서 문을 꼭 닫아걸고 독방에 들게 되었구나 창문도 없는 단칸방에서 면벽정진 해야겠구나 혼자 얼었다 혼자 녹았다 산이 되고 강이 되겠지 미처 안녕이란 말도 남기지 못했지 용서를 구한다는 말은 더욱 못했지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빨리 이런 순간이 오리라곤 생각지 못했지 아, 눈시울 붉히고 나를 마주보는 저…… 벽이 갑자기 갈라진다 옆집 마리아가 몸을 들이민다 아니, 벌써 나도 승천했나 저런, 세상에, 번호 누르는 걸 깜빡했군요 마리아가 내 대신 肉번을 누른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가슴 치며 통회를 끝내기도 전에 문이 열린다 그럼 그렇지 아직 담금질 끝나지 않았지 수 천 수 만 번 더 오르락내리락 해야겠지 나는 충혈된 눈을 비비며 허둥지둥 환생한다


―「그리운 연옥」 전문

 

 

삶이 고정점이라면, 죽음의 체험이 이동점이다. 닫힌 엘리베이터가 휴관일의 그 관(“휴, 관이에요”)을 흉내 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체험은 물론 의사(擬死) 체험이다. 고정점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체험이 옆집 여자를 “마리아”로, 이동을 “승천”으로, “6번”을 육체의 번호로, 문의 여닫힘을 전생(轉生)으로 바꾸어낸다.
이 의사체험은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경계 너머의 체험이다. 돌아다니는 죽음이 멈춰 있는 삶에 말을 건네는 것이다. 이 전언을 따라가 보자. 먼저, 그 죽음은 황홀경의 다른 이름이다. “토막난 내가 지상으로 떨어지네/(……)/그가 피리를 닦아/다시 불면/구름꽃 새겨진 내 사지가 스르르 이어 붙네/싸늘하던 온 몸에/필리리 필리리/피가 도네.”(「마법의 성」) 힌두 구루의 유명한 마술에 빗댄 이 일화는 사지절단이 엑스터시임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 가운데 하나다. 알을 낳고 죽는 암컷 오징어의 “마지막 밤”을 “죽도록 황홀한!”이라고 수식하는 마음도 다르지 않다.(「특별한 밤」)

다음으로, 죽음은 늙음의 알레고리다. 이를테면 “입술이 있던 기억만 남았을 그 자리에 지금/붉은 립스틱을” 바르는 미라가 그렇다.(「붉은 립스틱을 바른 미라」) 저 미라의 립스틱은 미를 치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내게도 꽃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옛일이 되었다는 것. “결혼 며칠 앞둔 딸아이/(……)/나도 20년 전 져버린 꽃/미용실처럼 더 이상 아무도 찾지 못할/숨은 꽃이 될까”(「꽃 미용실」) 딸은 생머리였어도 꽃인데, 꽃 미용실은 이름을 내세웠어도 꽃이 아니다. 나는? 20년 전에는 꽃이었다. 그런데 이 탄식은 단순한 탄로(歎老)가 아니다. 내게서 딸로, 다시 “딸의 딸의 딸”로, 꽃들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꽃이 지지 않는 나라”다. 돌보는 이 없어 골병이 든다 해도, 그 병은 개화의 다른 이름이다. “나무는 꽃 피우기 위해 봄마다 병들었고/병들기 위해 해마다 꽃을 피우기도 했다.”(「골병나무」)


그 다음, 죽음은 고통스런 삶의 암유다. 아파서 죽겠네, 라는 탄식이 아파서 죽었네, 라는 비유로 전환된 것이다.

 

 

시체보관소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던 내가 다시 깨어난 건 바로 그때였어요 검시관들이 내 왼쪽 가슴을 메쓰로 5센티쯤 그어내려갔을 때 내가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지요 뭔가 잘못됐다고 판단한 검시관들이 절개부위를 황급히 꿰맸다지요 사망선고까지 받았던 내가 통증을 견딜 수 없어 벌떡 일어났다지요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스포츠센터에서 땀을 흘렸고 10년 전부터 그토록 즐기던 담배까지 끊었으며 아침마다 명상의 시간까지 지켰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싸늘한 시신으로 빈집에서 발견되었던 이유, 사인은 끝내 규명되지 않았지요


―「자주 부검되는 남자」 부분

 

 

이 부검은 물론 고통의 극한적인 표현이다. 나는 시체여서 부검을 받는 게 아니라, 부검을 받으니까 시체다. 세상에, 살아있는 몸에게 이런 고통이 있을 리가 없다! 그 후로도 나는 자주 쓰러졌다. “이러다 모든 게 지워지고 나면 어떤 고통도 다시는 나를 깨우지 못할 거예요 아무도 어떤 것도 어떤 기억도 없이 투명해진 나를 붙잡진 못할 테지요.” 기억과 고통을 인과판단으로 묶었음에 유의하라. 고통은 기억 때문에 생긴다. 이 기억을 버린다면 고통도 사라질 테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몸이란 게 시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 삶은 갇힌 채 “쓸개즙”을 빨리는 “늙은 어미곰”의 삶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고통이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니체와 쓸개즙」) 같은 말을 덧붙이는 건 사치다.


궁극적으로 죽음은 삶 그 자체다. 죽음이 삶의 이러저러한 부면을 설명해서만은 아니다. 삶이 죽어가는 일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냥 죽음이 삶의 동의어인 때가 있는 것이다. 고정점과 이동점이 자리를 바꾸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다.

 

 

어제도 오늘처럼 나는 죽고 또 죽었지
어린 아들 손을 잡고 푸른 신호등 꺼져가는
횡단보도를 황급히 건너며,
귤 몇 알과 삼겹살 반 근
검은 비닐봉지 뭉쳐 넣은 시장가방을 들고
코가 막힌 아이와 목이 부은 어미가
은별상가 3층 이비인후과를 헐레벌떡 들어서며,
보험카드를 내밀며

 

세상에서 무엇을 보장받으랴
불의의 교통사고, 특정암......
불특정다수를 겨냥한 운명의 총구 앞에서
새벽밥을 짓고 멸치를 볶고
도시락을 싸주며 키미테를 붙여주며,
여보, 얘들아, 우산 우산!
일기예보를 토정비결처럼 신봉하던 어머니를 흉내내며,
빈집에 홀로 남아 묵주알을 굴리며

 

영원히 죽지 않고 늙기만 하는 티토노스 인양
잠들기 전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콜라겐 나이트크림을 처덕거리며,
빼앗아간 젊음을 밤새 되돌려달라고
예고 없던 정전에 허공으로 날아가버린
오로라 파일이나 어서
되돌려달라고, 깨어지며 쭈글쭈글해지며
죽어도 죽어도 죽지 않는 내게
가장 소중한 잃어버린 반쪽
죽음을 되돌려 달라며
오늘도 어제처럼 나는
여기 저기서 죽고 있지


―「오늘의 운세 2」 전문

 

 

1연의 죽음이 삶의 동의어라면, 3연의 죽음은 젊음의 동의어다. 이것은 단순한 반어가 아니다. 그 모든 비판과 반성의 들끓는 복판을 통과한 후에 얻어낸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강조점은 그것이 삶이냐 죽음이냐 하는 결론에 있지 않고, 그 명명 너머에서 영위되고 있는 과정 자체에 있다. 1연과 2연 전체 그리고 3연의 전반부를 가득 채우는 일상잡사의 생생함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니야, 운명이 내 목숨을 소환할지도 몰라, 이런 탄식 뒤에서 삶은 제 갈 길을 삶답게, 생생하고 묵묵하게 관철해 나간다.

 

이제 삶과 죽음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꿔보자. 그래도 이 이중적인 걸음걸이의 내포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두 편만 살핀다. 먼저 사랑과 소문:

 

 

한때 내 목숨처럼 사랑했던 남자, 허쏘문
그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있고,  열면 또 문이......
내가 다 열어보기도 전에 그는
박물관 옆 도서관 지붕 위에 잠시 머물던 구름처럼 사라져버렸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다 헛소문이었네, 목숨처럼


―「헛소문」 부분

 

 

이 시가, 마지막 문장이 얘기하듯, 사랑의 불가촉성(不可觸性)을 얘기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 덧붙인 말(“목숨처럼”)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내 사랑은 헛소문 혹은 “허쏘문”(소리나는 대로 적은 이유는 소문이 뜻이 아니라 그냥 소리 나는 대로 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이었으나, 사실은 “목숨”도 그렇다. 죽음의 여정이 삶이라는 중심점을 수식하는 긴 원주였음을 기억하자. 내 사랑이 그냥 소문이었다는 게 아니라, 그런 소문을 나는 목숨처럼 실천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인용한 부분의) 2행을 보면, 그 소문을 낳는 것이 사실은 사랑의 속성임을 알게 된다. 그를 알면 알수록 그는 더 깊은 속내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니겠는가? 결국 사랑이 이전의 앎을 소문으로 바꾸어가는 비밀의 문, 그것도 여러 겹 중첩된 문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육체와 영혼:

 

 

신발공장에선 모두 그를 쏘울맨이라 부르지 언제나 그는 밑창 담당, 진창을 걸어도 물새지 않고 자갈밭을 달려도 닳지 않는 밑창, 그는 늘 바닥을 책임지는 남자, 그 밑바닥에는 떠나간 쏘울메이트가 아직도 살고 있지 어제도 꿈속에 만났다네 그가 만들어 준 분홍 구두를 신고 반짝거리는 작은 발로 어디론가 사라지던 그녀, 소리쳐 불러도 뒤돌아보지도 않던 그녀, 그 남자 마음 바닥을 오늘도 또각 또각 울리며 가네 그래도 아직 구멍 뚫리진 않았다고 울음소리 새나오지 않는다네 영혼은 밑바닥에 둥글게 웅크리고 남몰래 소리죽여 닳고 있지만 밟아도 뭉개도 쏘울맨 밑창은 쇠가죽이라고, 찰고무라고, 빈틈없이 본드로 단단히 붙였노라고

 

―「쏘울맨」 전문

 

 

소울(soul)은 통상의 의미로는 ‘영혼’이지만, 구어로는 ‘흑인의, 흑인과 관련 있는’을 뜻한다. 신발공장에서 그를 “쏘울맨”이라 부른 것은 그가 밑창 담당이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까매졌을 것이다). 그는 “늘 바닥을 책임지는 남자”였고, 그래서 온갖 더럽고 힘든 일들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 고행은 실은 아름다운 영혼의 선행이었다. 쏘울맨은 울음을 제가 갖고, 떠나간 그녀(“쏘울메이트”)의 발걸음을 다 받아내는 이였던 것. 여기서도 영혼과 육신은 둘이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자리를 바꾸고, 마침내 가장 낮은 곳에서 하나가 된다.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런 이중화된 전언을 읽을 수 있다. 오이디푸스의 절뚝이는 걸음이, 신데렐라의 자정이 처음부터 양쪽의 세계를 다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대로, “극과 극은 한통속이다.”(「용호상박」) 여전히 그녀의 걸음은 절뚝이고 있으며, 그녀가 앉은 자리는 자정의 부엌이다. 거기서 두 세계에 대한 통찰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곳은 ‘확신에 찬’ 갈릴레이의 마을이 아니라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이다. 우리는 이 슬픔을 재투성이 오이디푸스의 슬픔으로 읽었다. 그 슬픔마저 이중화된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바닥에 닿는 일이 네게로 가는 일인 그런 슬픔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너를 여는 중이다. 바닥난 나를 한 번 더 혼신으로 뒤집는 중이다.”(「모래시계」) 지금도 개방(開放)이 전복(顚覆)인 그런 세상이, 그녀 앞에,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