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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채원의「새장을 키우는 사람」평설 / 조영민

Beyond 정채원 2014. 2. 27. 01:50

정채원의「새장을 키우는 사람」평설 / 조영민

 

 

  새장을 키우는 사람

 

     정채원

 

 

   내 갈비뼈 사이에 똥을 싸는 새들, 울음을 바닥에 점점이 떨어뜨려 놓고 오른쪽 구석으로 몰려간다 옆구리가 결린다 새가 창밖을 보고 있어 블라인드를 반쯤만 내린 방, 어느 쪽에 먹이가 더 많은지 어느 비탈에 걱정이 많은지 눈먼 방이다 먹이보다 빛이라는 듯 제 그림자를 끌고 창가로 몰려드는 새들

 

   내 그림자를 쪼아 댄다 쿡쿡, 전선처럼 얽힌 내 신경줄 위에 앉아서 쿡쿡, 방향 없이 울어댄다 쿡쿡, 운석이 폭발하는 밤 쿡쿡, 쑤시는 등골에 별 두 조각이 박혀 쿡쿡, 새장이 되었다

 

   새장에 갇히는 울음도 있나 날개를 가둘 수는 있지 울음을 가둘 수는 없지 잠글 수는 더욱 없지 나는 다만 새장을 키우는 사람

 

   울음소리가 전과 다른 새들, 나는 왼쪽으로 돌아눕는다 횡격막 밑을 서성이다 새장으로 들어가 스스로 갇히는 새도 있다 반쯤 썩은 붉은 돌을 문지방에 토해놓고 밖을 내다보는 새들, 나는 얼른 벽 쪽으로 돌아눕는다 너를 재우기 위해 나를 재운다 새들을 잠시 다른 별에 풀어놓는다

 

   어떻게든 너를 다시 새장 속으로,

 

 

                       —《시산맥》201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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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애의 메커니즘

 

 

 

   참신한 소재를 발견하면 시 전체가 참신해진다. 시인은 자신의 몸을 객관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몸속 뼈들이 ‘새장’임을 발견한다. 시적 자아는 ‘새’가 움직일 때마다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새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정도이다.

   1연의 “옆구리가 결린다”라는 표현은 시인의 정서를 증폭시킨다. 2연의 “쿡쿡, 방향 없이 울어댄다”, “쿡쿡 쑤시는 등골에 별 두 조각이 박혀”에선, 시인의 비애(悲哀)가 설득력을 얻는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새’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그러나 ‘새’는 일반적 상징을 넘어선 또 다른 상징으로 확대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나와 타자 간 애증의 텍스트로, 시를 국한하여 읽는다면 무미건조하다.

   무엇보다, “새장을 키우는 사람”이라는 제목에는 시를 관통하는 아우라가 있다. 물론 제목이 내용을 끌어주는 견인차와 같지만, 이 시의 제목은 내용을 푸는 공구함 같은 성격을 가진다. 칼 바르트는 “사람의 몸속에 갈비뼈를 집어넣어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사람은 ‘뼈’를 가짐으로써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 수 없는 운명인 것. 예로부터 공동체의 생활이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혼의 질은 높이지 못한 채 구속을 가져왔다. 여기에 타워 크레인은 “내 몸(시야)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몸은 내 것이지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공동체의 몸으로 바뀐 지 오래다”라고 토로한다. 따라서 “새장을 키우는 사람”에서 보듯, 시인은 몸을 돌아볼 때마다 무언가를 키운다는 인식을 가져왔다. ‘키운다’는 말은, 시적 자아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억압의 기제들을 가리킨다.

   실제로 우리의 몸에는 기존의 가치와 위계질서가 끊임없이 자란다. 그것이 시에서 ‘갈비뼈’로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3연의 “새장에 갇히는 울음도 있나”, “울음을 가둘 수는 없지”, “잠글 수는 더욱 없지”라는 구절들은 시인의 절망적 상황을 들려준다. 더 나아가 5연의 “나는 다만 새장을 키우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타자를 억압하는 존재가 자신임을 고백한다.

   바르트의 시각으로 보면 “몸이 인간의 구원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한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몸은 소멸하지만 억압의 기제는 끊임없이 자란다. 상대를 가두고 나를 가두고 우리마저 가둔다. 때문에 시인은 ‘새장’이라는 상징을 통해 허무와 비애의 파토스에 침윤된 일상을 환기시킨다. 더불어 날마다 파행적으로 뒤틀려가는 삶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시는 콘텍스트를 바꾼다면 다양한 메타포가 나타난다. 그만큼 해석의 진폭이 크다. 만약, 몸의 내전(內戰)에 참여한다면 슬픔의 신도시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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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민 / 전남 장흥 출생.  2012년 〈영남일보〉신춘문예 당선과 《현대시학》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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