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눈’의 시선과 ‘패치워크’의 시법
이성혁(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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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원의 ?일교차로 만든 집?을 읽으면서, 시인이 좀처럼 평온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심연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도리어 심연을 향해 있는 계단을 과감하게 내려간다. 그것은 지상으로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더라도 지옥을 기어코 보겠다는 의지가 이끄는 것일까? 그러한 시인들이 있다. 지상에서 지옥의 문을 기어코 찾아내고는 지옥으로 내려가 시를 쓰려고 하는 영웅적인 의지를 품은 시인들이. 하지만 정채원 시인은 그러한 영웅적인 시인은 아닌 듯하다. 심연으로의 하강은, 「시인의 말」에서 시인 자신이 말하듯이, “내 고독과 불안과 슬픔을 먹고” 자라는 “몸 안의 그 생물”의 조종에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시인의 말」에 따르면, ‘그 생물’이 시인을 ‘물가’로, ‘들판’으로, ‘모래언덕’으로 이끌어갔던 것인데, 그렇게 시인은 무엇인가에 이끌려 물가와 들판과 모래언덕이 펼쳐져 있는 마음의 심연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시인은 그 과정에서 붙잡은 이미지들로 시를 구성해나갔을 것인데, 시인의 의식은 그 어떤 생물에 의해 완전히 와해된 것은 아니라서 몽유병자처럼 돌아다니는 시인의 마음의 행로를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
이 생물에 사로잡혀 조정당하는 무의식적인 무엇과 이의 행로를 기록하는 의식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의식 너머의 심연을, 후자는 심연을 바라보는 자신을 바라본다. 시인이 자신의 눈을 ‘짝눈’이라고 말하는 것(「짝눈」)은 그 때문일 테다. 하지만 ?현대시? 2014년 7월호에 실린 김영범 평론가의 「세외도원으로 가는 천년여행」이라는 글을 보면, 정채원 시인은 정말로 홍역으로 죽음 가까이 갔으며 그로 인해 심한 짝눈이 되었다고 한다. 시인에게 짝눈은 은유가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인데, 시인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현실을 자신의 시적 정체성으로 전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짝눈」에서 시인은 “오른 눈에 비친 세상과 왼 눈에 비친 그 너머”가 시소를 타듯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늘 한쪽이 무겁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두 눈 사이로 “불 꺼진 가로등처럼 윤곽이 지워진 얼굴들”-“세발자전거”와 “파랑새 악보”와 “심장을 앓는 청년”-이 “어른거리는 것들”이 되어 “흔들리는 배경”이 된다. 두 눈 사이에는 한쪽 눈이 보는 세상과 다른 눈이 보는 세상 너머가 겹쳐지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포착된 ‘얼굴들’은 윤곽이 지워지면서 어른거리는 것들이 되는 것이다.
다른 방향의 시선 사이에서 그 두 시선을 겹쳐놓는 것, 이것이 정채원 시인의 시적인 보기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한 시작(詩作)은 “지독한 일교차”를 경험해야 하는 것으로, 냉동고에 “영하 20도로 얼어 있다가도/고춧가루 벌겋게 뒤집어쓰고 냄비 속에서/펄펄 끓는”, 극과 극의 삶을 겪어야 하는 ‘고등어’와 “눈을 맞추는 일”(「일교차로 만든 집」)이기도 하다. 냉동고에 얼어 있는 고등어의 현재에서 그 너머의 “지느러미 찢긴 채 갑판 위에서 냉동고로 끌려가던 그날”(같은 시)과 같은 과거를 보거나 펄펄 끓는 물에 들어갈 미래를 보는 것, 즉 현재의 세상에서 극한의 과거와 미래를 보는 것이 시인의 시작 태도인 것이다. 또한 시인은 어떤 존재의 흔적으로부터 그 존재 너머에 있는 타자의 운명을 보기도 한다. 가령 「서더리탕」에서 시인은 ‘서더리탕’을 보면서 자살로 치달으면서 자신의 살을 다 해체하게 되는 현대인의 운명을 생각한다. 서더리탕이란 생선살을 회 뜨고 남은 부위(서더리)에 야채 등을 섞어 끓인 탕 아닌가. 이에 살이 다 풀어헤쳐지고 남겨진 “저 뼈만 남은 가슴”이 당신의 것 아닌지 질문하면서 시인은 시의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주 사적인 생각에 빠져
뼈다귀들이 설설 끓고 있다
거품이 악성 댓글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담 든 몸에 파스 붙이듯
이름을 계속 갈아 붙이고 살던 남자가
아파트 11층에서 떨어졌다, 단풍 붉게 물든 늦가을
회 뜨고 남은 살점 군데군데 붙어 있는 뼈다귀가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어디론가 헤엄쳐 가고 있다
짠물에 새기던 사소한 고독의 가시 무늬
익명탕이 홀로 졸아들고 있다
저 “설설 끓고 있”는 “뼈다귀들”이 당신의 것이라면, “아주 사적인 생각” 역시 당신의 생각이리라. 그 생각은 거품으로 표현된다. “악성 댓글” 같은 거품으로 말이다.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은 생각들을 보면 저 ‘서더리-당신’은 “아파트 11층에서 떨어”진 남자일 수 있다. 저 서더리탕은 광어의 것인지 도미의 것인지… 우럭의 것인지 당신의 것인지 모르는 뼈다귀들로 만든 ‘익명탕’이다. 그나 당신과 같은 익명. 그러니 “이름을 계속 갈아 붙”여도 상관 없는, 그래서 “이름을 계속 갈아 붙이”면서 살고 있는 그는 당신이기도 하리라, 자살한 그나 당신이나 나나, 서더리탕의 뼈다귀들처럼 “사소한 고독의 가시 무늬”만을 남기고 “홀로 졸아”드는 익명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서더리탕과 익명의 삶을 동시에 보면서 그 두 존재를 겹쳐놓는 것, 그래서 현상하게 되는 세상과 존재의 ‘흔들림’. 이것이 시인의 ‘짝눈’이 지니는 시학적 의미라고 하겠다. 즉 짝눈의 시학은 우리의 존재를 삶의 흔들리는 배경으로 현현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2
익명의 존재이기도 한 짝눈의 시인은 세상의 윤곽이 지워지는 어둑한 시간에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부풀어 오르는 어둠 속에서”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어둠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면서 “일기를 쓰고 다른 울음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며, “달을 건너가는 동안/발목이 천천히 지워지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밤마다’ ‘수집’하는 사람이다.(「문워커(Moonwalker)」) “몸을 바닥에 묻고 눈만 내놓고/바람 몰려가는 암청색 하늘을 더듬”(「참외처럼 외로운 저녁」)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익명의 존재이자 짝눈인 시인의 삶이다. 그래서 그의 자아는 “씨앗 빼낸 참외처럼” 속이 “텅 빈 동굴”(같은 시)일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의 자아는 세상의 달빛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익명의 존재들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여관방과 같다. 그래서 시인이란 존재는 특히 더 외로운 익명의 존재-여관방-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텅 빈 동굴과 같은 내면 공간은, 「밤의 네 번째 서랍」에서 짝눈의 시학에 따라 그 공간 너머 시인이 갇혀 있는 공간-네 번째 서랍-으로 전환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 시에서 시인은 “동굴처럼 깊”은 “서랍 속”에 가두어져 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동굴을 울리며 메아리치는/소리 안쪽으로 깊숙이 걸어들어” 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하기 위해 “문득, 목을 꺽자/“죽은 별들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고 “얼어붙은 혀들이 왁자지껄하”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도망치듯 빠져나오던 내 뒷덜미를/얼굴 없는 목소리들이 낚아챌 듯하”고 “싸늘한 석고의 얼굴들이 곁에 와” 눕는 것이다. ‘네 번째’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그곳은 죽음의 공간이다. 서랍은 죽음의 이미지들이 시인에게 들이닥쳐 그를 사로잡아버리는 공간인 것이다. 그 서랍에 서식하는 죽은 자들은 시인이 벗어날 수 없는 동굴 같은 자아에 왔다 가는 발목 지워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지불안증후군」에서 시인은 그들의 ‘얼굴들’이 “핏줄 속을 뛰어다”닌다고도 말한다. 그 얼굴들은 “회칠한 무덤 위/캄캄한 비문처럼 뭉쳤다가 흩어”지면서 “나를 해독하라고/4분에 한 번씩 나를 깨”우는 것이다. 그것들은 시인의 핏줄 속에 해독을 기다리면서 ‘뛰어다니는’ 죽음들이다. 핏줄 속의 죽음들로 시인은 “반쪽이 죽은 얼굴”이 되어 “4초에 한 번씩” “한쪽 눈을 감았다” 떠야 한다. 그 반쪽 얼굴은 죽음에 감염되어 있으며 한쪽 눈은 해독을 원하는 핏줄 속의 죽음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정채원 시인이 ‘짝눈’이 될 수밖에 없는 연유를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서랍-핏줄’ 속에서 아우성치는 죽음들, 또는 「시인의 말」에 나온 “몸 안의 그 생물”이 한쪽 눈을 다른 한쪽 눈과는 다른 쪽으로 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죽음의 이미지들이 시인을 사로잡는 ‘서랍-핏줄’에서 시인은 빠져나올 수 없다. 그 서랍에는 자물통이 “입 꼭 다문 채” “매달려 있”(「밤의 네 번째 서랍」)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서랍은 핏줄 같은 반대 방향으로, 아파트와 같은 공간으로 확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쇠창살을 박은 통유리 창문”(「입주」)이라는 이미지는 자물통 채워진 서랍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또한 현대의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는데서 오는 지루함은, 시인에 따르면, “중세 부하라의” 사형집행인들이 죄수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높은 첨탑으로 자루 속에 그들을 담아 올라갈 때 그들이 느낄 “죽음의 공포를 위한 시간”(「계단의 방향」)과 대비되기도 한다. 두 시간 모두 한순간의 ‘짜릿한 추락’을 오히려 더 원하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을지 모른다.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데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죽기 위해” “다시 빙벽을 오”(「불타, 오른다」)르는 마음 역시 저 부하라의 사형수의 마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정채원 시인에게는 죽음이 아우성치는 핏줄이나 서랍과 같은 좁은 공간-시인의 내면 공간-은 아파트나 부하라의 첨탑, 더 나아가 산과 같은 넓은 공간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그에게는 안쪽 공간과 바깥쪽 공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시집 첫머리에 실린 「낙원 빌」에서도,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곧 시인의 기억이 펼쳐지는 내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불빛을 등지고 앉은 내 뒷모습이 보인다 불빛을 마주한 상대방 얼굴을 볼 수 없다 604호 불빛에 먹혀버린 사람은 왼손을 들어 문을 가리킨다 808호에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죽은 사람이 있다 곁에는 내 친구들 연락처가 적힌 수첩이 펼쳐져 있고 한 쪽 다리가 부러진 안경도 떨어져 있다 이인삼각 놀이를 하다 너는 발목을 나는 목을 부러뜨렸지 숨이 막혀도 서로 부둥켜안고 놓지 않았어 내가 가장 아끼던 모자는 화장실에 걸린 채 입을 꼭 다물고 305호 문이 잠겨 있다 문 앞에서 나와 한 아이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너는 꼭 내 어릴 때를 닮았구나 엄마의 심부름으로 아스피린을 사오던 나는 20년 후의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아이는 나를 피해 비상구 쪽으로 가려 한다 계단들 벽들 문들을 지나 어디에 있든 어디에 숨든 나를 피해가지 못한다 지하에서 백년옥 1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는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내 생일은 첫눈 내리는 4월의 밤, 어떤 기억도 기대도 없이 한 사람이 낙원에 막 당도했다
- 「낙원 빌」 전문
이 시에서도 ‘짝눈의 시선’이 여지없이 나타난다. “불빛을 등지고 앉는” 나의 시선과 그 나를 바라보는 시선 사이에 위의 시의 장면들은 놓여 있는 것이다. 전자의 시선은 시 안에 있는 나의 것이고 후자의 시선은 시 안의 나를 바라보는 시 바깥의 서술자의 것이다. 내면 공간이자 빌라를 이루는 방들의 공간은 그러한 두 시선의 벌어진 사이를 통해 형성된다. 저 아파트는 나의 분신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그 분신들은 죽은 사람으로, 심부름 하는 아이로, 그 아이와 만나는 나로 등장하거나 더 나아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분신들이 나타나는 이 기이한 아파트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얼굴 보이지 않는 ‘상대방’-나와 “불빛을 마주”한 “604호 불빛에 먹혀버린 사람”-이다. 그 역시 나의 분신 아니겠는가? 808호에서 익명으로 죽은 자는, “곁에는 내 친구들 연락처가 적힌 수첩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면 나 자신일 테다. 죽은 나의 옆에 놓인 “한 쪽 다리가 부러진 안경”은 “이인삼각 놀이를 하다가” 발목을 부러뜨린 ‘너’일 것이다. 시인에게 안경은 짝눈을 교정하기 위한 기구 아니겠는가. 저 안경이 부러지는 것과 ‘나’의 목이 부러지는 것이 동시적인 일이라고 할 때, 808호에서의 죽음이란 바로 짝눈을 부정하고자 했던 삶의 죽음이라고도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죽음이 이루어졌던 방에서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서는, 20년 후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아스피린을 사오던” 아이(나의 어릴 때를 닮은 아이)와 내가 만나서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아이 역시 나의 분신일 터, 그 아이와 대화하는 나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나일 것이다.(젊은 나와 아이인 나가 만나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나이가 훨씬 든 시인이다.) 그런데 아이인 내가 청년인 나를 피해 도망치는 것을 보면, 시인이 이미 청년기에 아이로서의 나와 불통하기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인 나와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 도망치는 아이-나-는 “어디에 숨든 나를 피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선은 아이를 놓치지 않고 따라간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첫눈 내리는 4월의 밤”에 기어코 도달하고 만다.(4월에 첫눈이 내릴 리는 없지만, 눈이 내릴 수는 있다. 4월에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그때 만약 눈이 내렸다면 그 눈이 첫눈일 테다.) 하여, 저 아파트는 한 사람의 탄생에서 (상징적)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공간화 한 ‘백년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자신의 탄생의 지점에 도달한 시인은 “낙원에 막 당도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낙원은 아이러니를 담은 말이다. ‘낙원빌’은 지옥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기에 그렇다. 삶을 심연에 빠뜨리는 공간이 ‘낙원빌’이기 때문이다. 「세외도원(世外桃園)」에서의 ‘도원’ 역시 바로 ‘낙원빌’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도원은 “죽어도 죽어도 죽지 않고, 죽고 싶어도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곳이다. 즉, “내 남자의 꽃이 시들 듯하다가도 다시 싱싱해지고 네 여자의 꽃이 죽을 듯하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곳, “복사꽃 때문에 죽으면 그 자리에 복사꽃으로 피어”나는 곳이 ‘세외도원’이다. 낙원빌에서는 탄생과 죽음의 상호 전환이 꼬리를 물고 지속되지 않는가? 그곳의 아파트에서는 1층에서 808호까지의 사건이 반복해서 재생되지 않겠는가? 세외도원에서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듯이, 시인은 낙원빌에서 그러한 반복을 시지포스처럼 살아내야 한다.
낙원빌이라는 공간에서의 시간은 “제 꼬리를 물고 맴”(「우로보로스」)도는 ‘우로보로스’-꼬리를 삼키는 뱀 또는 용-의 시간이다. “어떤 기억도 기대도 없이” “낙원에 막 당도”한 ‘한 사람’(「낙원빌」)은 바로 갓 태어난 ‘나’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 아기의 우는 소리를 듣고 있는 장년의 ‘나’를 가리키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기인 내가 우는 소리를 듣고 있는 현재의 나는, 우로보로스가 제 꼬리를 삼키듯이 그 아기와 중첩됨으로써, “어떤 기억도 기대도 없는”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우로보로스의 삶이란, 그렇게 앞뒤, 위아래, 전후의 시공간과 주체와 대상(너와 나)이 끊임없이 서로 교체되고 겹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교체와 중첩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삶은 지옥에서 시지포스가 받은 형벌과 다름없는 것이다.
3
우로보로스의 삶은 밑도 끝도 없는 심연에 들어가는 삶이요, 걸어도 언제나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출구 없는 미로를 걸어가는 삶이다. 시인에 따르면, 그러한 우로보로스의 삶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몇 겹 어둠 속을
제 꼬리를 물고 맴돌았나
눈뜨면 다른 방이었다
말을 타고 달리며 화살을 쏘았다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얼굴을 다른 말들이 밟고 달려갔다
피는 내 가슴에서 흐르고
나는 아직도 살아 있나 뙤약볕 아래
표범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깨어났다
찢어진 콧잔등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알갱이
안간힘을 쓰며 흘러내리지 않으려는
모래알갱이, 바람이 불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돌아눕는
구겨진 파지가 휴지통 근처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방
검은 잉크로 물든 검지를 한참 내려다보다
읽던 책으로 얼굴을 덮고 잠들어버렸다
언제나 단칸방이었다
아기를 재우고 있었다
아기가 빨던 공갈젖꼭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고
자장가를 부르다 하품을 하다 그만 잠들어버렸다
방은 하나뿐이라는데 낯선 방은 자꾸만 열리고
먼지바람 날리는 붉은 별에서 뱀처럼 바닥을 기었다
어둠 속에 소리쳐 다른 생명체를 찾았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밤안개가 입김처럼 가슴을 덮었다
수많은 뒤통수가 떡 버티고 선 어둠속으로 검은 물체가
날개를 퍼덕이며 내 어깨를 사납게 치며 사라져 갔다
돌아서지 않는 얼굴, 문득 잠 깨면 너와 내가 바뀌어버린 얼굴
잠속의 잠으로 꿈속의 꿈으로 방은 끝없이 이어지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는 사이 서로를 잊었고
다른 방에서 마주쳐도 화살자국을 알아보지 못했다
화살을 쏜 자도 화살을 맞은 자도 그 누구도
- 「우로보로스」 전문
심연으로 떨어지는 삶, 미로에 이끌리는 우로보로스의 삶은 글쓰는 자의 삶이다. 시인은 “구겨진 파지가 휴지통 근처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방”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방은 모래언덕이며 시인은 “안간힘을 쓰며 흘러내리지 않으려는/모래알갱이”다. 모래언덕은 “바람이 불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돌아눕는”다. 이쪽과 저쪽이 뒤섞이는 공간인 것이다. 그곳은 얼굴이 뒤바뀌는 틈, “찢어진 콧잔등”이기도 하다. 내가 “말을 타고 달리며” 쏜 화살에 맞아서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얼굴을 다른 말들이 밟고 달려갔”을 때 얼굴이 찢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얼굴은 누구의 얼굴인가? 죽은 줄 알았던 내가 살아 깨어났을 때 그렇게 찢어진 틈을 통해 표범의 얼굴과 사람의 얼굴의 중첩과 교체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시인은 “표범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깨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화살을 맞는 대상은 표범이었다. 물론 그 표범이라는 짐승은 나의 또 다른 존재일 테다.
그 표범의 얼굴이 사람의 얼굴-나의 얼굴-로 변모하면서 시인은 ‘표범-사람’이 된다. 이러한 변신은 내가 ‘표범인 나’에게 화살을 쏘는 행위-이것이 시 쓰기의 출발 아닐까?-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리하여 시인이 매달리고 있는 모래언덕처럼 얼굴의 중첩과 교체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시인이 글을 쓰는 방 자체 역시 “먼지바람 날라는” 모래언덕-“붉은 별”-이니, 방 역시도 얼굴처럼 끊임없이 다른 방이 될 것이다.(그 방은 우선 “아기를 재우고 있었”던 단칸방으로 변신한다.) “방은 하나뿐이라는데 낯선 방은 자꾸만 열리”는 것이다. “잠속의 잠으로 꿈속의 꿈으로 방은 끝없이 이어지”고, 그 변형의 미로 같은 방에서 시인은 “너와 내가 바뀌어버린 얼굴”로 살아가야 한다. 방이 바뀔 때마다 시인의 얼굴은 뒤바뀐다. 나와 뒤바뀔, 다른 방에 있는 너의 얼굴이 무엇일지는 모른다. 그 얼굴은 “돌아서지 않는 얼굴”인 것이다. 그래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는 사이” 얼굴은 모를 얼굴로 뒤바뀌면서 “서로를 잊”게 되며, 이젠 “화살을 쏜 자도 화살을 맞은 자도 그 누구도” “화살자국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주체와 대상이 뒤섞여버려 구별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 바꾸어 말하면 이젠 어떤 얼굴의 내가 시 쓰기의 주체인지 모를 지경이 된 것이다. 시인은 우로보로스의 삶이라는 심연에 빠져버렸다. 그는 분별가능한 세계의 문턱을 넘어 식별 불가능한 지대에 빠져버린 것이다. 시인의 삶을 심연에 빠뜨린 시 쓰기의 주체는, 「시인의 말」에서 말한 몸속의 다른 생물임을 시인은 위의 시에서 감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뱀처럼 바닥을 기”면서 “어둠 속에 소리쳐 다른 생명체를 찾”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 생명체는 잠시 자신의 몸을 드러내고는 사라져버린다. “날개를 퍼덕이며 내 어깨를 사납게 치며 사라져” 간 “검은 물체”가 아마 그 생명체 아니겠는가. 그 검은 물체는 「불곰이 불쑥」에서 “내 코를 뭉개 놓”고 “입술과 아래턱을 물어뜯”은 불곰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잠에서 문득 깨어 거울을” 볼 때 “밤에만 잠시 뛰쳐나”와 “나를 마주” 보는 불곰. 그 불곰의 폭력이 시인의 얼굴을 다른 얼굴과 뒤섞어 “반은 어제이고 반은 오늘인 새 얼굴”로, “낯선 얼굴”로 만드는 주범이다. 물론 시인 내면에 살고 있는 타자인 불곰은 곧 시인의 숨겨진 분신일 테다. 깔깔거리다가도 “목구멍에서 흐느낌이 흘러나오”게 하는 분신. 잠들었을 때에도 잠들지 않는 한쪽 눈과 같은 존재. 그렇기에 그 불곰의 앞가슴엔 시인의 “손톱이 새겨져 있”는 것이리라. 또한 반대로 시인의 “얼굴 밖으로 불곰이 발을 불쑥 내밀”기도 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불곰에 의해 시인의 얼굴은 찢어지고 “얼굴 반쪽이 갑자기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진 반쪽 얼굴을 대체하여 어제의 반쪽 얼굴과 오늘의 반쪽 얼굴을 접합하는 주체는 바로 시인 자신이다. 시인의 주체성은 여기에서 드러난다. 시인은 “숨도 쉴 수 없는 콧구멍들/키스도 할 수 없는 반쪽짜리 입술을/새것을 구해다 이어 붙”이고 “단정하고 사려 깊은 구멍을 뚫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시인의 시 쓰기란 불곰과 같은 몸속의 생물에 의해 찢겨나간 자아의 파편들을 다시 이어붙이는 작업이다. 그것은 “냉정한 벽과 침대를 이어 붙”(「패치워크」)이는 ‘패치워크’의 시법을 통한 작업인 것이다.
지는 꽃과 피는 꽃을 이어 붙인다면
반은 울고 반은 웃는 얼굴
꽃보다 아름다운 꽃이 될까
- 「패치워크」 부분
찢겨 나간 얼굴의 파편들로 만든 낯선 얼굴-“반은 울고 반은 웃는”-은 “꽃보다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다. 불곰과 같은 ‘몸속의 생물’은 시인의 자아를 고통스럽게 찢어놓겠지만, 시인은 염세주의나 감상주의로 나가지 않는다. 그 상처를 ‘패치워크’의 시법을 통해 “꽃보다 아름다운 꽃”으로, 시로 전화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그 작업은 특별난 것이 아니라고 시인은 생각하는 것 같다. 익명의 삶을 사는 아파트 주민들 역시 “밤새 들들들/토막 꿈을 이어 붙이”(「패치워크」)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주민들의 그러한 삶 속에서 모란의 아름다움은 “괜히 피었다 지”(같은 시)는 것이다. 시인은 찢어진 삶의 조각들을 이어붙이는 패치워크의 작업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를 아래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아침을 먹었는지, 혈압약을 두 번 먹은 건 아닌지, 낮꿈 속에 딸이 다녀갔는지, 머리맡에 명란젓을 두고 간 건 누군지, 쭈글쭈글 껍데기만 남은 발을 주무르다 간 건 10년 전 죽은 남편이었는지, 와글와글 개그 콘스트를 틀어 놓고 다시 잠에 빠져드는 아흔일곱 엄마를
딱풀로 붙인다 침을 발라 붙인다 오공본드로 붙인다 내 눈물 눈곱으로 붙인다 날아가지 마 나비야, 품 안에서 꽃피던 것들, 심장이던 것들, 심장 태운 재에서 날아오르던 것들, 쭈그러지지 마 부서지지마 너의 뒷모습은 찢어진 밤의 목소리, 싸늘한 가면을 바꿔 쓰고 도망치지 마 흩어지지 마
- 「천 년 여행」 부분
“찢어진 밤의 목소리”인 “너의 뒷모습”이 “싸늘한 가면을 바꿔 쓰고”도망치거나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서 침이나 딱풀, 아니면 오공본드를 사용하여 붙이는 작업. 그것이 정채원 시인의 패치워크로서의 시다. 그 찢어진 목소리이자 뒷모습은 시인을 포함한 익명의 삶들이 살아가는 “와글와글 개그 콘서트”와 같은 일상 속에서 “꽃피던 것들”이자 “심장이던 것들”이었으리라. 시인은 태운 재가 되어 날아오르거나 찢겨져 떨어져나가려고 하는 그것들, 그 나비와 같은 것들을 붙잡고 이어 붙이는 일을 한다. 그 일은 “찢어진 밤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봉합하지 않으면서, 불곰과 같은 ‘몸속의 생물’을 따라 심연으로 용감히 들어감을 통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꽃보다 아름다운 꽃”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타자가 되는 심연의 문턱을 넘어서서 미로에 들어갈 줄 알아야 한다. 아래의 시에서와 같이 나비들이 죽어서 넘어간 “꽃모가지 툭 툭 부러지는 건너편”으로 건너갈 수 있어야 한다. 그 건너편이 “건너가도 여전히 건너다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부는 “상한 바람에도 실려 오는 꽃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넘어가야 하는 경계가 있다
저 미친 구름들은 그곳을 넘어왔다
네게로 가려다 얼어 죽은
나비들을 노랑개미 떼가 끌고 간다
꽃상여를 둘러메고 숨이 차게
달려가면 꽃모가지 툭 툭 부러지는 건너편
건너가도 여전히 건너다보이는
건너편, 돌팔매를 던지면
상한 바람에도 실려오는 꽃향기
태양은 피 끓는 것들의 머리통을 밟는다
가라! 건너가라!
- 「붉은 파도」 후반부
이성혁(李城赫, Lee Seong-Hyuk)
- 1967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2003년 ?대한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저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등.
『예술가 』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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