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잠복潛伏/안차애

Beyond 정채원 2023. 10. 8. 23:53

잠복潛伏 

 

 안차애

 

 

 

숨소리를 듣는 것은 위험하다

숨소리 속에서 잠복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상처와 더러운 기억들을 두통약처럼 달고 사는 이들의

들숨과 한숨 사이에는 치명致命이 산다

 

영화 속의 남자 형사들은

위험한 여자들의 숨소리와 웃음소리를 훔치다가 겹겹 숨의 동그라미에 갇혔다

 

잘 웃고

강아지처럼 둥근 눈초리를 가진 용의자들의 숨소리는

특히 위험하다

 

마술사의 스카프와 흰 손 사이에서

새가 날고 장미가 피고 기침 소리가 나는 사탕이 튀어나오듯,

 

번진 숨소리에서

금 간 심장이 굴러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깨진 물의 흐느낌 소리를 만질 수도 있다

 

상처로 상처를 태우는 숨은 불완전 연소라서

중독성 기체의 농도가 높은 것일까

더러운 기억 위에 쌓이는 더러운 기억은, 끈끈이주걱처럼

감염의 통로를 찐득찐득 열어 놓는 것일까

 

숨소리를 훔친 자들은 잠복기를 거친 바이러스처럼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병을 통과한다

 

온몸이 하나의 신경다발인 듯, 뚝뚝 끊어지거나

툭툭 나가떨어지는 하드보일드한 질병이다

 

 

 

 

 계간 《문파》 2023년 가을호

'밤의 네 번째 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바다/김남조  (0) 2023.10.12
유리컵에 비 담기/이향란  (1) 2023.10.09
아이스크림의 황제/황유원  (1) 2023.10.06
여적餘滴/한기팔  (0) 2023.10.04
지슬/강영은  (0) 202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