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저수지는 커다란 구멍으로 구름을 삼켜댔다. 저수지가 입을 벌렸다 다물 때마다 수면에 맺힌 그림자들이 한꺼번에 지워졌다. 구름에 가려 있던 새들까지 삼켜버린 걸까? 허공을 흔들어대던 새 울음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날개 없는 것들은 잔물결을 타고 물가를 끊임없이 떠돌았다. 모로 드러누운 산 그림자를 삼키다 말고 게워내는 물빛이 역류성식도염처럼 검푸르게 반짝였다. 저녁이면 고무 탄내를 풍기며 비포장길을 돌아가는 바퀴 소리가 산 그림자 속을 파고들었다. 젊은 부부가 나란히 누운 산등성이 쪽으로 부는 바람은 자주 노을빛을 띠었지만 깊은 밤 저수지를 서성이는 사람의 속내까지는 물들이지 못했다. 물 위에 뜬 그림자들을 삼켜댈수록 저수지 가를 떠도는 그림자들은 점점 늘어만 갔다. 저수지의 큰 구멍이 입이 아닌 자궁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들려온 것은 그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집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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