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우울증 환자/김상미

Beyond 정채원 2023. 11. 3. 12:47

우울증 환자

 

 

그는 지독한 우울증 환자

의사가 준 알약을 먹고

자신만이 아는 길을 향해 떠난다.

그 길에 한 번도 들어서보지 못한 이들은

지옥처럼 불타고 있다고 말하는그 길을.

가끔은 꿈속에서처럼 그와 마주칠 때가 있다.

상심의 지렛대 위에 정다운 얼굴들을 올려놓고

그 끝에 앉아 아슬아슬 웃고 있는 듯한.

그때마다 손 내밀어 같이 놀아주고 싶지만

그는 지독한 우울증 환자

입속으로 무수한 알약을 털어 넣으며

몸안에 있는 창이란 창은 모조리 잠그는 사람.

 

아무리 그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쳐도

따뜻하고 포근한 솜이불 대신

싸늘한 북풍을 여행 가방 가득 쑤셔넣고

심연에 그어놓은 무수한 골목길 따라

언제나 자신에게서 먼 곳, 더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로 아름답게 접히는 부분

아무리 그에게 보여주고 입혀주어도

불 꺼진 지하처럼 유독한 마음 안에 모조리 찢어 넣고

그는 간다, 언제나 똑같은 자리.

자신을 가두고 또 가두었던 끝없는 고통 속,

새까만 우울 곁으로.

 

 

 

김상미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시인선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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