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을밀대 지붕 위의 체공녀처럼/한영수

Beyond 정채원 2023. 12. 10. 13:20
         

을밀대 지붕 위의 체공녀처럼


 한영수




돌담에 떨어진 동백꽃은 살아있네
무서운 기색도 없이 등을 곧추 세우고
을밀대 지붕 위의 체공녀처럼*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네
생활은 겨울이고
왜 동백나무는 서서
생활의 복판에 떨어진 꽃 하나
저녁의 둘레를 도네
소리도 향기도 섞지 않고 붉은 색은
눈에 가슴에 스며서 번지지만
꺼내기가 어렵네
무엇이 꽃이 되는지
지면서 여기서
순간은 어떻게 영원에 닿는지
눈보라 속의 통로를 여는지
큰 수술을 앞두고 현관을 나서기 전
미등을 끄고 수도꼭지를 잠그고
한 번 더 돌아보는 심정으로
자꾸 나는 더듬거리네
꽃을 버린 꽃을
어긋나면서 피는 꽃을
여기 꽃이 있다,
꽃보다 큰 꽃을
고립되면서
독립하는 꽃을
눈은 숨차게 쌓이고
눈 속은 붉은 꽃 소용돌이
나는 갇혔네




*체공녀 강주룡 ; 평양 고무공장의 여공. 1931년 최초로 고공농성을 벌인 노동운동가.

 [제17회 서정시학상 수상작]




  《서정시학》 202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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