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죽
흰,
창호지 내음새
창호지 내음새가 나서
울음 둘레 같은 것도 있다
느리게
빈산이 걸어와 비치고
산의 뒤편으로
울긋불긋 꽃마을도 숨었다
마알간 숨 아래
외던 경經처럼
흰 죽 한 그릇
젓던 손은 시리고
싸락눈이 와서
흐린 발자국도 생기는
흰,
길
그림일기
나무를 그렸다
하늘을 밀쳐낸 큰 가지들과
큰 가지를 필사적으로 붙드는 작은 꽃봉오리 가지들을 그릴 때는
숨을 죽이고
바다를 그렸다
수평선을 긋고 수평선을 넘어오는
옛날의 돛단배를 그렸는데 배는
한 번도 아주 온 적은 없다
집을 또 그렸다
바다를 그린 다음 날
우리 집,
사람이 없으면 그건 우리 집
틀림없이
새를 그린다
허공에
붙박이는 새는
커다란 입을 다물 줄을 모른다
하늘을 그린 적은 없다
낮과 밤, 봄, 가을
하늘은 한 번도 제 본디를 보여주지 않았다
허나 하늘은 그리지 않아도 있었다
언뜻 언뜻 한결같이
모두 다르게 도둑같이
나를 그린다
훗날
먼 훗날
바람이 나를 그린다
집과 나무가,
마른 풀과 서리, 늙은 개
뒹구는 돌이 나를 그린다
《유심》 2024년 봄호
'밤의 네 번째 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밤의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김종태 (1) | 2024.05.01 |
---|---|
검은 뱀/홍일표 (0) | 2024.04.06 |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황인찬 (0) | 2024.01.30 |
이민 가방을 싸는 일/정영효 (1) | 2024.01.26 |
이승악*/강영은 (0) | 2024.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