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흰 죽 외 1편/장석남

Beyond 정채원 2024. 4. 4. 23:08

 

흰 죽

 

 

흰,

창호지 내음새

창호지 내음새가 나서

울음 둘레 같은 것도 있다

 

느리게

빈산이 걸어와 비치고

산의 뒤편으로

울긋불긋 꽃마을도 숨었다

 

마알간 숨 아래

외던 경經처럼

흰 죽 한 그릇

 

젓던 손은 시리고

싸락눈이 와서

흐린 발자국도 생기는 

흰,

 

 

 

 

그림일기

 

 

나무를 그렸다

하늘을 밀쳐낸 큰 가지들과

큰 가지를 필사적으로 붙드는 작은 꽃봉오리 가지들을 그릴 때는

숨을 죽이고

 

바다를 그렸다

수평선을 긋고 수평선을 넘어오는

옛날의 돛단배를 그렸는데 배는

한 번도 아주 온 적은 없다

 

집을 또 그렸다

바다를 그린 다음 날

 

우리 집,

사람이 없으면 그건 우리 집

틀림없이

 

새를 그린다

허공에

붙박이는 새는

커다란 입을 다물 줄을 모른다

 

하늘을 그린 적은 없다

낮과 밤, 봄, 가을

하늘은 한 번도 제 본디를 보여주지 않았다

 

허나 하늘은 그리지 않아도 있었다

언뜻 언뜻 한결같이

모두 다르게 도둑같이

 

나를 그린다

훗날

먼 훗날

 

바람이 나를 그린다

집과 나무가,

마른 풀과 서리, 늙은 개

뒹구는 돌이 나를 그린다

 

 

 

《유심》 2024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