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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네 번째 서랍

[스크랩] 김혜순의「유령학교」감상 / 황병승

Beyond 정채원 2014. 9. 12. 15:07

김혜순의「유령학교」감상 / 황병승

 

 

유령학교

 

   김혜순(1955~ )

 

 

나는 유령학교에 근무한다

이 동네에선 유령된 지 10년 지나면 자동으로 제도권 유령이 된다

나는 신참 유령들에게 수업을 한다

(이 일 때문에 도무지 잠적이란 불가능하다)

우선 머리에 책을 올리고 발을 땅에 대지 않고 걷는 연습

말해봤자 아무도 듣지 않고 설 자리 누울 자리 없고

눈밭에 제 발자국이 남지 않아도 놀라지 않도록

공중에 떠서 잠드는 법을 연습시킨다

관 속에서의 우울증 극복법이라든지

지하 시체보관실에서 더운 공기를 내뿜지 않는 법

사막에게 잡혀가도 미라가 되지 않는 법이라든지 하는 것은

나도 모르지만 그냥 목청 터지는 대로 한다

시간공장 제조 망원경이나 현미경 착용법 유체이탈법

잊혀진 영혼이 되거나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아도 서러워하지 않는 법

불을 확 질러버렸으면 하고 생각만 하는 법

폭죽이 밤하늘에 떠 있는 그 순간만큼 환하게 당신에게 창궐하는 법

은 교과서를 참고하세요 그렇지만 교과서는 짓지 않는다

노래 속에 숨어들어가 흐느끼는 법

흐느낌 속에 숨어들어가 숨을 참는 법

흐르는 사람들과 함께 흐르다가 나무처럼 하늘로 흑흑 박차 오르는 법

금관에서 소리가 퍼져 나가는 모습의 항법에 이어서

내 몸의 테두리를 지우고 형용사 되는 법

그리하여 나날이 엷어지는 법

은 전해 내려오는 마술 속에 다 있어요

그러면서 덧붙여 말한다

앙갚음하는 유령은 하급

눈비 내리는 밤에만 출몰하는 유령은 중급

썩어서 파리를 피워 올리는 유령은 상급

구름처럼 물음처럼 기체처럼 유령은 상상급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상상상급, 등등 기타

자 그럼 파리 떼가 죽은 몸뚱어리에서 왼쪽 날개 먼저 꺼내듯

춘설처럼 창궐하는 유령 연습 한 번 해볼까요?

그러면서 숙제 안 해오는 유령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유령학교 졸업하고 제도권 유령밖에 될 게 없다니,

쳇!

 

 

                             —시집『슬픔치약 거울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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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유령학교를 으스스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시 수업에만 열중한 탓이었다. 당시 상상상급 유령이었던 김혜순 선생님은 신참 유령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고, 수업 시간에 지적을 받는 날은 처참한 기분이 되어 술집으로 직행하곤 했다. 진짜 유령이 되고 싶어서, 유령도 사람도 아닌 채로 사는 게 고달파서, 매일 밤 유령들로 넘쳐나는 학교 앞 술집을 전전하며 죽도록 마시고 깨어나는 기초유령연습으로 나날을 보냈다. 졸업과 함께 동기들은 유령 되기를 포기하고 가까스로 사람이 되거나, 제도권의 유령이 되었다. 오늘 밤은 ‘사막에게 잡혀가도 미라가 되지 않는 법’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황병승(시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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