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새들
청포도주 얼룩과 토사물들이
키와 갈고리에서 흩어지며 날 씻었다네
-아르튀르 랭보, 「취한 배」
멀지 않은 곳에서
어린 새들이 죽은 채 발견되었다
비둘기의 발걸음으로 다가와
까마귀의 날갯짓으로 끝이 나는 사건들
새의 떼죽음도 그런 사건들 중 하나
출근길의 교통사고처럼 곧 잊혀지고 마는 일
점호도 없이 일제히 날아오르던
새들은 어디로 갔나
곡식알처럼 흩뿌려져도 부딪치는 법이 없던 새들은
마가목 열매 때문이었다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발효된 열매,
붉고 둥근 칼집 속의 칼날이 새들의 영혼을 쪼개버렸다
천국에서 불어오는 바람 앞에
기우뚱거리는 날개를 미처 접지 못한 새들
자라기도 전에 날개가 꺾여버린
하늘의 익사체들,
새들에게 치사량의 알콜은 얼마쯤 될까
취한 새들은 곤두박질쳐서
벽에, 유리창에, 전선에, 다른 새들의 몸에 부딪쳤을 것이다
찢어진 북소리처럼 날갯소리 들렸을 것이다
그 순간 새들은
하늘의 착란을 이해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땅에 뒹구는 마가목 열매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물에 취한 배도 있으니
포도주의 얼룩으로만 씻겨지는 몸도 있으니
—《포지션》2013년 여름호
--------------
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밤의 네 번째 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김혜순의「유령학교」감상 / 황병승 (0) | 2014.11.19 |
---|---|
[스크랩] 프랙탈/ 안희연 (0) | 2014.10.05 |
[스크랩] 함민복의 「선천성 그리움」감상 / 고두현, 황병승 (0) | 2014.09.19 |
[스크랩] 김혜순의「유령학교」감상 / 황병승 (0) | 2014.09.12 |
야사/홍일표 (0) | 2014.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