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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이다희 시집

Beyond 정채원 2024. 5. 18. 18:21

 

 

 

 

 

   무화과나무 여름 바구니 이름

 

   이다희

 

 

   여름이 맞는지 알아보려고 뛰어든다

 

   물의 표면을 깨뜨리면서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호수에 나를 새기듯

   한중간을 향해 헤엄을 쳐

 

   어디가 한중간인지 물 밖으로 머리를 내어 가늠하는데

   알 수 없어

   결국 맞은편에 도착해

 

   정수리부터 땀이 흐르고 이가 달달 떨려

   내 입술이 낯설어

   추운 건지 더운 건지 알 수 없어

 

   여름일까?

 

   옷이 맞은편에 있는데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 걸어가야 할까

   나는 할 수 없이 벗은 채로 물에 들어가

   다시 헤엄을 쳐

 

   그러다가 문득 방금 도착했을 때

   이가 달달 떨렸을 때

   그때가 한중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나는 크게 원을 그려 손으로 발로 마음으로

   계속 큰 원을 그려

 

   나 이번엔 도착하면 옷을 집어 입고 그대로 달려나갈 거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달릴 거야

 

   길은 계속 이어지고 나는 나의 한중간이 조용히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호수를 나와  맨몸으로  서서  이를 달달 떨었던 일은 잊히지 않는다.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는 다짐은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 내 앞의 풍경들은 점점 바뀌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앞의 풍경들이 바뀐다고 뒤의 풍경도 바뀐다는 희망은 품지 않게 되었다.

 

 

 

 

 

   이다희 시집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문학과지성 시인선 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