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이장욱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영원을 잃어버렸다.
자꾸 잃어버려서 믿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
원래 그것이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이제 달리지 않고 누워 있다.
목적지가 사라진 풀밭에 자전거를 버려두었다.
바퀴의 은빛 살들이 빛나는 강변을 바라보며
이제 불가능해지는 일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였다.
풀밭에는 아주 작은 음악들의 우주가 펼쳐져 있고
그것을 아는 것은 쉽다.
진실로 그것을 느끼는 것은 모로 누운 사람들뿐이지만
누구의 왕도 누구의 하인도 아니어서
외롭고 강한 사람들뿐이지만
은륜이 떠도는 풍경을 바라보면 알 수 있는 것
햇빛에도 인과관계가 있고 물의 일렁임에도 인과관계가 있고
달려가다가 멈추어 서서 문득 잔인한 표정을 짓는 일에도
원인과 결과가 있겠지만
오늘은 기도를 하지 않아서 좋았다.
매일 명확한 것들만을 생각하였다.
나의 풀밭에서 부활하려고 했다.
거대한 존재가 내 곁에 모로 누워 있기라도 한 듯이
사랑을 하려고
석양이 내리자
아무래도 나를 바라보는 이가 보이지 않아서
텅 빈 주위를 둘러보았다.
히치콕의 밀도
창밖에 히치콕의 밀도가 높았다.
이면도로에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밀도가 높았고
골목을 지날 때는
홍상수의 밀도가
새벽마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해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중독자의 이름인데
그이는 중독자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는
결국
당신이 범인인가.
범인은 늘 범죄를 저지른 자리에 돌아오지. 가만히
생각해보아요. 당신은 쫓기는 자인가
쫓는 자인가.
추리하는 자인가
추리되는 자인가.
에드워드 양, 에드워드 양,
저도 양 씨인데요.
제게는 식물의 귀가 있어요. 식물인간이 되어서
문병 온 사람들의 고백을 듣는 게 제 장래희망이죠.
나는 관람당하면서 동시에
관람하는 거예요.
그들은 무엇이든 털어놓는답니다.
휴대폰을 켜두고 이제 막 라이브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그걸 시청하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있고
션 베이커의 인물이 ‘창녀’라는 욕을 남발할 때 좋았다.
그 인물 자신이 ‘창녀’였기 때문에.
피살자는 말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너에게만 나타난다.
늦은 밤 혼자 있는 방에서 천천히
천천히
뒤를 돌아보렴.
거기 서 있는
낯익은 얼굴을
오즈 야스지로처럼 늙고 싶지만
인생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메라를 낮은 곳에 두면 돼.
다다미에 두고 계단 아래 두고
지하실에
무의식
밑바닥에
결국 호스피스 병동의 밤에 깨어나는 것이죠.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침대로 다가와 인생을 고백할 거예요.
고백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을.
그를 따라갈까요.
사랑을 할까요.
첨밀밀만 보면서 인생을 보내고 싶어.
죽을 때는 내 곁에 그대가 없겠지만 등려군의 노래는 흐르리. 뉴욕의 전파사 앞에서
우리는 만나자.
근데 나이 좀 먹었다고 반말하지 말아요.
다리오 아르젠토라면 아무렇게나 찍어도
네 목을 날려버릴 거야.
가짜 같은 피가
정말로 솟구치겠지.
나는 골목을 걸어갔을 뿐인데
어디서 카메라가
나를 비추고 있었다.
이창이었다.
이장욱 시집 《음악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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