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책소식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병률 시집

Beyond 정채원 2024. 5. 1. 16:07

 

 

해변의 절벽

 

 

해안 절벽 찰랑이는 물결에 목을 걸고 바위가 떠 있다

바위 표면은 살려고 납작 붙어 있는 따개비 같은 것들로 희끗하다

내 눈에다 깊이 그것을 담으려 하지만

자주 물처럼 흔들려 어렵다

그것을 내려보다가 난 그만 울컥하였다

 

왜 슬프냐고 당신이 물었다

 

왜 슬프지 않으냐고 내가 물었다

 

만 년 전에 해안이 밀려와 여기 도착하였고

천 년 전에 높은 산으로부터

이 바위가 조금씩 굴러와 여기 잠겨 있을 텐데

어떻게 슬프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다

당신에게 자갈 하나 주워 건네는 것으로 다였다

 

 

 

 

어떤 그림 

 

  

미술관의 두 사람은 각자

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사람들에게 그림은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자신들은 서로를 깊게 바라보다

만지고 쓰다듬는 일로 바로 넘어갔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다

 

두 사람을 그림 안으로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이병률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문학과지성사, 20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