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자각夢, 정채원

크레이지 타워(Crazy Tower) 외 1편/정채원

Beyond 정채원 2023. 12. 19. 21:00

크레이지 타워(Crazy Tower)

 

정채원

 

 

오르는 자와 내려가는 자가 마주칠 땐

무조건 내려가는 자가 우선이다.

한사람이 간신히 지나갈만한 좁은 나선형 계단

언제까지 올라야 끝이 보일까

 

끝까지 가봤자 별 거 없더라

아니면

정상에서 불현듯 뛰어내릴 뻔한 사람을 간신히 붙잡았어

혹은

난 모든 걸 본 사람이니 너보다 한 수 위야

 

천기누설을 겨우 참고 내려가는 자들

뒤통수도 땀에 젖어 있다

 

힘들고 무서워 헉헉거려도

오르는 자 표정이 더 살아 있다

끝을 보기 전까지

설렘이 증발하기 전까지

 

암불루와와 타워*

아찔한 전망을 뒤로하고 내려온

마을엔 휘날리는 오색의 빨래들

 

빨아야 할 것들만 잔뜩 남은 패잔병의 얼굴로

승전가를 목 터지게 부르는 듯

 

 

 

*스리랑카에 있는 고산 타워

 

 

 

 

어스름 익사주의보

 

 

일몰도 일출 못잖은 고열이다

 

마음바닥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다슬기를 잡는 데 골몰하다가

하류로 무작정 떠내려갈 때

갑자기 유속이 빨라지거나

수심이 깊어질 때

 

누가 나를 붙잡아주나

발이 닿지 않는 허구렁, 원하지 않아도

문득 깊어진 꿈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아니야 아니야

모두가 지나갈 거야

또 하루를 떠나보내는 고열 몸살일 뿐

새털구름이 노을구름으로 바뀌는 서쪽의 짧은 황홀일 뿐

 

어스름이면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다슬기를 모른 척

집으로 돌려보낸다

눈먼 듯 지나가라, 잠잠 나를 지나쳐 가라

서쪽 불길에 닿을 듯

텅 비어 빛나는 저녁이마를

서쪽이 아닌 곳으로 돌려세운다

 

 

 

 

 

《시와정신》 202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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