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지 타워(Crazy Tower)
정채원
오르는 자와 내려가는 자가 마주칠 땐
무조건 내려가는 자가 우선이다.
한사람이 간신히 지나갈만한 좁은 나선형 계단
언제까지 올라야 끝이 보일까
끝까지 가봤자 별 거 없더라
아니면
정상에서 불현듯 뛰어내릴 뻔한 사람을 간신히 붙잡았어
혹은
난 모든 걸 본 사람이니 너보다 한 수 위야
천기누설을 겨우 참고 내려가는 자들
뒤통수도 땀에 젖어 있다
힘들고 무서워 헉헉거려도
오르는 자 표정이 더 살아 있다
끝을 보기 전까지
설렘이 증발하기 전까지
암불루와와 타워*
아찔한 전망을 뒤로하고 내려온
마을엔 휘날리는 오색의 빨래들
빨아야 할 것들만 잔뜩 남은 패잔병의 얼굴로
승전가를 목 터지게 부르는 듯
*스리랑카에 있는 고산 타워
어스름 익사주의보
일몰도 일출 못잖은 고열이다
마음바닥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다슬기를 잡는 데 골몰하다가
하류로 무작정 떠내려갈 때
갑자기 유속이 빨라지거나
수심이 깊어질 때
누가 나를 붙잡아주나
발이 닿지 않는 허구렁, 원하지 않아도
문득 깊어진 꿈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아니야 아니야
모두가 지나갈 거야
또 하루를 떠나보내는 고열 몸살일 뿐
새털구름이 노을구름으로 바뀌는 서쪽의 짧은 황홀일 뿐
어스름이면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다슬기를 모른 척
집으로 돌려보낸다
눈먼 듯 지나가라, 잠잠 나를 지나쳐 가라
서쪽 불길에 닿을 듯
텅 비어 빛나는 저녁이마를
서쪽이 아닌 곳으로 돌려세운다
《시와정신》 202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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