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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식

허리를 굽혔다, 굽혀 준 사람들에게/한영옥 시집

Beyond 정채원 2025. 2. 4. 00:32

 

 

구원의 감각

 

한영옥

 

 

밤늦어 외진 벌판 시골 정거장에

왜 홀로 으스스 떨고 있었나

까닭이야 앞과 뒤로 수북하지만

두려움 껴입고 서 있어야 했던

구구한 사정을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그 자리에서 생생하게 겪어 낸

초조와 불안 요동치던 맥박

그리고 어느샌가 옆자리를 채워 준

연인들의 따끈한 입김에 대한 기억

공포감이 툭 터질 듯하던 때에

언 몸을 다독여 주던 구원의 감각

감각은 구원의 기미에 민감하다는 걸

그 이후에 떠올려 보고 했었다

오래 불안감에 시달리는 네게 전한다

'불안은 불안이 불안해하는 거'라는

푸른 페이지의 문장을

 

 

 

 

폐일(吠日)

한영옥


해를 보고 짖는 개를 보았네
해를 처음 본 탓이라고 알고 있네
제 알던 범위에서 벗어난
낯선 눈부심이 두려운지
점점 맹렬하게 짖어가네
제 알던 범위에서 훌쩍 벗어난
콸콸 끓어오르는 해를 보며
짖는 도리밖에 도리가 없나 보네
제 아는 범위의 황홀을 두르고
자홀(自惚)에 빠진 갑남을녀들을
꾸짖어 보겠다는 엉뚱함은 아닐 터
마구 짖어대다가 벌어진 입을
쉽게 다물기가 쉽지 않은 것이겠네
벌써 해가 진 것도 모르는 모양이네
시퍼렇게 어둠으로 살아나 흘러내린
산자락에 휘감기면서도.


*폐일吠日―중국 촉蜀 땅은 산이 높고 안개가 짙어 해를 보기 힘든 탓에 개가 해를 보면 짖는다는 뜻으로, 식견이 좁은 사람이 타인의 훌륭한 말이나 행동을 비방한다는 비유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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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하는 "사람"은 힘겹게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자기의 이해와 편협한 시선으로 가름하는 세상의 이치는 서로 짖어대는 좁은 세상을 이룰 뿐이다. "해를 처음 본 탓"에 "낯선 눈부심이 두려운지" "해를 보고 짓는 개"의 비유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지금 사는 세상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제 아는 범위의 황홀"에 빠져 눈부심조차 낯선 세상에서 시인은 그 닫힌 "범위"를 넓히려고 "시퍼렇게 어둠으로 살아나 흘러내린/산자락"을 세상에 휘감아 놓는다.

   서로 좁은 "범위"안에서 짖어대고, 욕설이 차고 넘치는 상호성의 끈질긴 반복 속에서 시인은 궁극적으로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어떤 '기원'을 향하고 있다. 완성이라는 마지막 결말이 아니라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변이 과정 속에 관여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붉게 구불거리며" 가는 시인의 걸음 위에 또 하나의 줄기가 뻗어나가게 될 것이다.

                                                                                                     

   ―김태형(시인)의 해설(지연된 기원) 중에서 발췌.

 

 

한영옥 시집 『허리를 굽혔다, 굽혀 준 사람들에게』, 청색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