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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나금숙 시집

Beyond 정채원 2025. 1. 22. 22:45

 

 

 

 

사과나무 아래서 나 그대를 깨웠네

 

 나금숙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

나무 아래 사과들은 해거름에 찾아오는

젖먹이 길짐승들의 것

꿈에서 깨어도 사과나무는 여전히 사과

베이비박스 속의 어린 맨발은

분홍 발뒤꿈치를 덮어줘야 해

쪼그맣게 접은 메모지에

네 이름은 사과

그러나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지을 때까지 지어보려는

파밀리아 성당처럼

사과들은 공간을 만들고

구석을 만들고

지하방을 만들고

삼대의 삼대 아비가 수결한 유언장 말미의 붓자국처럼

희미한 아우라를 만들고,

산고를 겪는 어미의 거친 숨결이

사과나무 가지 사이로

새로운 사과를 푸르게 푸르게 익혀가는 정오쯤

우리는 비대면을 위해 뒤집어쓴 모포를 널찍이 펼쳐서

하늘을 받는다 하늘의 심장을 받는다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뜨,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변용.

 

 

 

 

최초의 감정

 

 

마취도 없이 치르는 개두술 때, 뜨거운 골수를 만지는 감정,

 

밤새 기어서 바다에 닿자마자 파도에 휩쓸리는 어린 바다거북의 감정,

 

몇 개의 계단 위 제단에서, 깃털이 벗겨지고, 내장이 훑어지고, 둘로 쪼개어진 새 한 마리와 그의 피에 대한 감정,

 

발트해 리가 골목, 검은머리전당 옆에 놓여 사람들의 첫 발을 받아들이는 네모난 돌의 감정,

 

여름 궁전 숲 그늘에서 너와 처음 헤어질 때, 뒤돌아보는 얼굴로 떨어지는 햇빛의 감정,

 

머리에 쓰는 새장 화관 속에서 우는 찌르레기의 울음은 울 때마다 최초의 감정이려니,

 

쇳물을 끓여 부어 만든 동종이 처음 울릴 때 종의 유두,

 

팔월 한낮 마당에 내리꽂히는 소낙비의 첫 발바닥,

 

내가 누구야 하고 그대를 부를 때마다 목젖 깊이 차오르는 최초의 감정,

 

임종 때 사람들이 서로 부르는 간절한 이름,

 

그 마음으로 천지에 가득한 최초의 감정

 

 

 나금숙 시집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 시작시인선 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