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앞에 앉아,
나는 여태,
나의 주어가 못 되는 처지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그립다,
죽겠습니다.
꿈의 독서
방안을 살피는 일이
잠자리를 들추는 일이 아니기를
책을 살피는 일이 문장을 소독하는 일이
아닌 것처럼 눈의 검은자가
흰자위의 독백을 이해할 때
꿈이 찾는 조용한 가치들
선명한 여름인데 우리
찢긴 페이지처럼 갈피가 없어
너는 말없이 울고 빗물에 젖은 새처럼 흐느끼고
하마터면 내 눈에 쏟아질 것 같은 널 안고
팔베개를 해주었지
책을 보았는데, 꿈은
커다란 구렁이를 목에 휘감고 자는 일이래
그럼 무섭지 않아요?
너와 나 우리 모두가 그런 거라면
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해주었지
용기가 난 듯, 너는 넘어진 책장을 일으켜 세운
지난밤 꿈 얘기를 했는데, 불길한 눈을 가진
계집애를 보았다고 분명
어려움이 닥칠 거라며, 그새 잠이 들고 말지만
아득하고 따스한 너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네가 말하는 걸
꿈에서만 하기로
그러니 그 밤, 책을 꼭 안고 잠들면
너는 얇고 보드랍고
어떻게든 내 것 같았지
묻다
종일 마른 비 내리는 소리가 전부인 바다였다
욕실에는 벌레가 누워 있고 그것은 죽은 물처럼 얌전한 얼굴,
구겨진 얼굴을 거울에 비추면
혐오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미개한 해변 위에 몇 통의 편지를 찢었다
날아가는 새들, 날개 없는 새들이 폭죽처럼 터지고
파도가 서로의 몸을 물고 내 발끝으로 와 죽어갔다
한번 죽은 것들이 다시 돌아와 죽기를 반복하는 백사장에서
떠난 애인의 새로운 애인 따위가 그려졌다 다시
더러워지고는 했다
그대의 손등처럼 바스락거리는 벌레가 욕실에 있었다 벌레는,
곱디고운 소름 같은 어느 여인의 잘라낸 머리칼 같았다
나는 위독한 여인 하나를 약봉지처럼 접고
오래도록 펴 보았다 많은 것이 보이고
슬펐으나 한결같이 흔한 것들뿐이었다
나는 애먼 얼굴을 거울 안에 그려두었다
잘린 머리칼을 제자리에 붙여주면 어여쁘고 흉한,
평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독한 미소의 여자가
커다란 가위를 든 채 거울 밖에 있었다
이 위태로움을 어찌 두고 갈 수 있을까? 그대여,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라고 쓴 그대의 편지를
두어 번 기억하며 해변을 따라 걸었다
슬픔에 비겁했다, 생각할수록 자꾸 여며지는 백사장
말하자면 그건 소용없는 커튼, 소용없는 커튼은
창밖을 곤히 지웠다 도무지 펄럭이지 않았다
파도는 죽어서도 다시 바다였다
죽을힘을 다해
죽는 연습을 하는 최초의 생명 같았다
오병량 시집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 문학동네시인선 212 (2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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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량 / 1981년 출생. 201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첫 시집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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