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아버지 옷/장석남

Beyond 정채원 2025. 5. 28. 06:05

제33회 공초문학상 수상작

 

 

아버지 옷

 

장석남

 

 

다락방에서 아버지 옷을 입어보았다 아버지의

서른 살 혹은 마흔 몇 살의 어깨를 감쌌던

소매가, 어깨 끝이 닳았고 안감은 너덜거렸다

중학생에게 터무니없이 컸으나 나는

그 옷 속에서 안온하였다 내 속에도 소중한 무엇이 있는 듯했다

한 번쯤 그 옷을 걸치고 거리를 걸었던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감정을 데리고 대문을 나섰으나

골목 끝쯤에서 망설임에 패하여 돌아섰던가?

왼쪽 안주머니 앞에 수놓인 노란 아버지 한자(漢字) 이름이

심장에 닿아 따끔거렸는데 그것은 희미한 불씨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지

옛적, 집 안에 숨겨 보존했다는 전설의 그 불씨 말이야

아들이 곧잘 내 서른 살의, 마흔 살의 옷을 걸치고

서둘러 현관을 나선다 쿵! 대문을 닫고 나간다

엉치 아래 내려오는, 소매 긴 옷을 입고

나는 알지 그 감정 자락을

아들이 눈 오는 저녁 거리로 나서는 날이면

나는 아득한 그 다락방으로 간다

함박눈이 쌓이는 그 다락방으로 가서

아버지 옷!

그래, 그 ‘아버지 옷’이라는 것이 있지

꽃이 꽃을 벗고

열매가 열매를 입듯이

아버지 옷

아버지 옷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창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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