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그랜드 투어/김정진

Beyond 정채원 2025. 5. 7. 15:15
그랜드 투어

 

김정진
 
 
 열차 들어오고 있습니다 서울
 벗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가본 가장 먼 서울
 벗어나다보면 도시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보입니다
 내릴 수 없는 곳을 지나는 중입니다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공장
 (터널)
 (다리)
 새벽 옅은 물안개
 낀
 저수지 낚시터
 채도 낮아 마주보아도 눈부시지 않은
 창백한 해
 
 눈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오직
 도착한 적은 없고 지나가면서만 본 적
 있습니다 파노라마
 감상하고 있습니다 퍼레이드
 시작되었습니까 부족한 잠을 이어 붙이는 사람들
 
 골조만 남은 다리
 (짓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몇 년째 같은 모습)
 어느 굴뚝 연기
 아파트 건설 현장의 타워크레인
 총 다섯 대
 
 (터널)
 
 빛바랜 하늘색 슬레이트 지붕
 폐차장에 가지런히 정렬하여 쌓인 폐차들
 공중에 매달린 폐차의 구조
 떠나려고 합니까
 남겨진 기분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원금속이라 적힌 벽
 제멋대로
 하지만 무너지지 않도록 잘 짜맞춰 쌓아놓은 고철들
 입 벌린 집게 크레인
 
 소리를 전기로 바꾸어 전송하고
 다시 그것을 소리로 바꾼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
 깎고 배열한 작은 금속에 도서관을 넣을 수 있다는 사실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이어진
 끝도 없는 전신주들
 
 아침
 오고 있습니까 물안개
 낀
 붉은 밭
 비닐하우스
 대략 스무 개쯤
 마른 풀 태우는 드럼통
 연기와 안개가 뒤섞인
 농로 가로지르는 파란 포터 트럭
 
 중부 내륙 지방에 내리는 비
 (일기예보에 없었다)
 점차 희뿌얘지는 창의 가장자리
 입김을 더하지 않아도
 멀어지고 있습니까
 
 창을 뚫고 들어온 비 한 방울
 
 (터널)
 점점 잦아집니다
 (터널)
 (터널)
 비는 잦아들고 있습니까
 (터널)
 
 옆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창을 통하면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옆자리에 앉은 것이 보입니다
 
 
《웹진 님Nim2025년 5월호

 

 

 

 김정진 시인
 2016년《문학동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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