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투어
김정진
열차 들어오고 있습니다 서울
벗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가본 가장 먼 서울
벗어나다보면 도시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보입니다
내릴 수 없는 곳을 지나는 중입니다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공장
(터널)
(다리)
새벽 옅은 물안개
낀
저수지 낚시터
채도 낮아 마주보아도 눈부시지 않은
창백한 해
눈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오직
도착한 적은 없고 지나가면서만 본 적
있습니다 파노라마
감상하고 있습니다 퍼레이드
시작되었습니까 부족한 잠을 이어 붙이는 사람들
골조만 남은 다리
(짓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몇 년째 같은 모습)
어느 굴뚝 연기
아파트 건설 현장의 타워크레인
총 다섯 대
(터널)
빛바랜 하늘색 슬레이트 지붕
폐차장에 가지런히 정렬하여 쌓인 폐차들
공중에 매달린 폐차의 구조
떠나려고 합니까
남겨진 기분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원금속이라 적힌 벽
제멋대로
하지만 무너지지 않도록 잘 짜맞춰 쌓아놓은 고철들
입 벌린 집게 크레인
소리를 전기로 바꾸어 전송하고
다시 그것을 소리로 바꾼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
깎고 배열한 작은 금속에 도서관을 넣을 수 있다는 사실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이어진
끝도 없는 전신주들
아침
오고 있습니까 물안개
낀
붉은 밭
비닐하우스
대략 스무 개쯤
마른 풀 태우는 드럼통
연기와 안개가 뒤섞인
농로 가로지르는 파란 포터 트럭
중부 내륙 지방에 내리는 비
(일기예보에 없었다)
점차 희뿌얘지는 창의 가장자리
입김을 더하지 않아도
멀어지고 있습니까
창을 뚫고 들어온 비 한 방울
(터널)
점점 잦아집니다
(터널)
(터널)
비는 잦아들고 있습니까
(터널)
옆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창을 통하면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옆자리에 앉은 것이 보입니다
《웹진 님Nim》2025년 5월호

김정진 시인
2016년《문학동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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